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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首丘初心
 작성자 : 최재운  2007-10-13 20:11:26   조회: 1676   
밤이 이슥하건만 추석을 쇠고 대구 쪽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읍내로 향하는 초입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 전에 없이 고향 마을 동구 밖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명절 차량 정체가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문제다. 평소 주말이나 연휴 때만 해도 이처럼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지는 않았다. 추석 전 벌초가 한창일 때와 추석이나 설 직후에 주로 나타나는 우리 한국사회 고유의 진풍경이다. 저마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한 차 가득 싣고 고향집을 나섰으리라. 가족들의 훈훈한 인정을 가슴에 가득 담고 부모님들이 정성껏 싸주시는 선물을 트렁크가 비좁도록 한 껏 채웠을 것이다. 각자 마음은 고향집에 그냥 둔 채 생업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이다. 멀리 한적했던 시골길부터 꽉 막혔으니 목적지에 닿을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명절마다 생활의 근거지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일 자체가 고난의 행군이 된지도 오래건만 그 수난을 사람들은 구태여 피할려고 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다시 때가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지난 날의 고초는 깡그리 잊어 버린다. 도로 정체 따위는 개의치 않고 부푼 가슴으로 부득부득 다시 고향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신비한 힘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힘든 고행을 해마다 되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도중에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도 흔쾌히 감수한다. 쏟아져 나온 차들의 홍수 속에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 긴 시간 오금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날밤을 새워도 개의치 않는다. 엄청나게 긴 시간을 차속에 갇혀 있어도 불평 한 마디 하는 법도 없다. 그저 그리운 얼굴 보고 싶은 고향산천이 눈앞에 와 있을 뿐이다.

누가 있어 이 거대한 민족의 대이동을 감히 막을 수 있으랴. 자연 발생적이고 원초적인 이 거대한 회귀본능을 무슨 재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어린 시절 자기를 품어주고 길러준 곳,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로 향하는 간절한 마음을 어찌 감히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있으랴.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사람의 경우에 말해서 무엇하랴. 어린 시절 무한한 꿈을 심어주고 마음껏 뛰놀던 고향산천을 어찌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겠는가.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대중가요의 주제 중에서 남여간의 사랑타령 다음으로 많은 것이 고향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애환이라고 한다. 고향과 향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근본적인 불치병임에 분명하다.

눈만 감으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옛시절의 아련한 기억들. 당장 달려가면 언제든지 옛날 그 곳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은 낯익은 산하, 동네 한복판 놀이터에서 혹은 뒷동산 언덕배기에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면서 함께 딩굴던 그 때의 그 개구쟁이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이 모두가 이제는 도저히 돌이킬 수도 다시 만나볼 수도 없는 귀하고 소중한 추억들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그들은 수 십 번을 따라가고 쫓아가도 도무지 손이 닿지 않는 저 먼 피안의 무지개요 아지랑이인 것을. 우리는 치유불능의 자기 최면에 걸려 환상과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작정 고향으로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너무나 달라진 고향 마을의 모습에 이게 아닌데 하는 실망과 가슴 한 구석 허전함을 애써 달래면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매년 똑 같은 고행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 때는 장죽을 문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하여 3대 혹은 4대가 대가족을 이루어 한 울타리 안에서 살던 시대였다. 하루 세 번 끼니 해결이 무엇보다도 큰 문제였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추억과 잊지 못할 기억이 더 많은 때이기도 하다. 비록 생활은 궁핍하지만 확실한 가부장적 전통과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뜨거운 가족애와 탄탄한 결속력으로 똘똘 뭉쳐 각자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던 시기였다. 초가삼간 장난감처럼 작은 방안에서 대 여섯 명의 식구가 방석만한 이불을 서로 다투며 엄동의 추위를 체온으로 녹이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넓은 방 하나를 혼자 독차지하고 바깥 세계가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며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 비해 결코 외롭지 않았고 서럽지도 않았다.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 때 누렸던 풋풋한 인간미와 은근한 가족사랑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 때 가족끼리 서로 몸을 부대끼며 한 숫갈의 밥도 나누어 먹었다. 형제끼리 한 조각 누룽지를 다투며 살면서도 우애는 남달랐고 가족애 또한 유난히 깊었다. 살기가 훨씬 나아진 오늘이지만 춥고 배고팠던 그 때의 인정이 오히려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그 때의 순진무구함이 이렇게도 그립고 가슴 저리게 절실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겨울철 저녁마다 먹는 씨래기죽 한 대접은 애초부터 근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밤이 깊어지면 언제나 출출하고 입이 궁금하기 마련이었다. 먹을 것이라곤 뒷담 밑 구덩이를 파고 묻어놓은 매운 배추뿌리며 싹이 노랗게 돋은 무우가 전부였다. 한 몫 끼기 위해서 무서운 줄도 몰랐다. 컴컴한 밤 얼어붙은 땅바닥에 엎드려 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모님들의 부추김에 실없이 우쭐해저 땅속에 묻어둔 배추뿌리며 무우를 꺼내오는 일을 도맡을 만큼 순진했다. 양념이 들어가지 않는 동치미가 나오는 밤은 훨씬 넉넉하고 고급스러웠다.

칼날 같은 얼음조각이 반 이상이나 섞인 동치미 국물과 세로로 길게 쪼개 나누어 주는 한 조각 무우 김치는 영원히 잊지 못할 향수요 소중한 추억으로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생생하게 살아 남았다. 이가 시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지만 기회를 한 번 놓지면 다음에는 차례가 내게 미치지 못하니 어찌 한가롭게 잠을 잘 수가 있으랴. 고모나 삼촌들은 어린아이가 잠도 없이 어른들의 일에 일일이 끼고, 눈이 말동말동 자네들만의 긴밀한 이야기를 죄다 듣는다고 곱지 않는 시선과 눈총을 주었다. 고모님들의 눈 밖에 나서 수수빗자루로 밥먹듯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지만 그게 아픈 줄 몰랐다. 가난하고 식구 많은 집안에서 어찌 한가하게 염치와 채면을 따지면서 살아 남기를 바라겠는가. 넉살좋게 잘 견디면서 기어이 응분의 몫을 챙기고 나서야 잠이 들곤 했다. 어렵고 배고팠던 그 시절, 눈물이 나도록 서럽고 생생한 추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롭다.

추석이면 유난히 많이 먹었던 호박전 생각이 간절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살림이라 먹을 것은 항상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식구 수는 무려 열 두 명이나 되었으니 배를 가득 채운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한이 차지 않던 때였다. 호박이 그의 전부이고 약간의 밀가루를 섞어 버무린 다음, 널따란 솥뚜껑을 뒤집어 약간의 기름을 둘러 얇게 붙인 호박떡이었다. 추석 특유의 별미인 동시에 필수 영양식이었다. 넓적한 광주리며 대소쿠리에 담아 부엌에는 물론이고 장독대며 헛간 등 천방지축 개구쟁이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높직히 올려두었다. 그렇다고 악동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도둑고양이처럼 야금야금 집어내 먹어치웠지만, 어머니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 같다. 감미료나 첨가물이 없어도 맛이 있었다. 별다른 간식거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호박 자체에 단맛이 많아서 허기를 메우는 구황식품으로는 제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막힌 자연식품인 동시에 가난을 이겨낸 명품 추석 음식이었던 셈이다.

이젠 추석이 되어도 그 때의 호박전은 더 이상 맛볼 수 가 없다. 엄동설한 기나긴 밤에 주린 배를 채워주던 맵싸한 배추뿌리며 시원한 동치미, 그리고 이마까지 시리게 하던 국물도 없다. 서로 몸을 부딪치며 흙바닥을 함께 딩굴던 그 친구들도 이제 모두 떠나고 없다.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아침저녁으로 닦달하던 고모님들도 연로하시어 예전의 정정하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여러 가지 병환으로 거동조차 불편하시다. 세월은 한 번 흐르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마음은 옛날 그대로 인데 반세기가 훌쩍 흘러 나 또한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초로의 나이가 되었으니 어찌하랴. 사람들은 흔히 나이는 자기만 먹는 줄 착각한다. 스스로 나이드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고향 산천과 친구들, 사랑하는 일가 친지들, 어렸을 적 죽마고우들, 심지어 부모님들까지 항상 옛모습 그대로 이기를 바라고 있으니 가당치 않은 이기심이요 터무니없는 자가당착이다.

때아닌 궂은 비로 무척 오래 시달린 끝에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게 개어 추석다운 추석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일주일 정도 명절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련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이라 명절 냄새도 이제는 딱 하루 당일 뿐이다. 차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성묘를 다녀오고 각자 뿔뿔이 갈길을 찾아 흩어진다. 심지어 형제 자매간에도 서로 떠나고 도착하는 시간이 달라 명절이 되어도 얼굴도 못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꼭 찾아 보아야 할 곳도 대개 명절 당일에 다 돌아보고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치열한 생활전선으로 복귀할 준비를 한다. 예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으나 집집마다 차가 있으니 가능해진 일이다. 농업이 위주가 되어 씨족단위로 한데 모여 살던 옛날과는 완전 딴판이다. 누구를 탓하랴. 시대가 변하고 풍속이 달라졌으니 말없이 그저 따라갈 수 밖에. 세상사 거대한 물결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게 마련 아니겠는가.

보름달이 훤히 비취주는 한 밤중, 읍내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생존을 위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을 본다. 길게 늘어서 있는 차량의 빨간 후미등이 오늘따라 낯설기만 하다. 저 수 많은 차 속은 형형색색의 사연들로 가득하리라. 추석명절을 쇠느라 지친 몸을 싣고 있을 그들은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무엇인가 알지 못할 막연한 아쉬움, 귀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억울함과 허전함,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릿한 그리움, 과거에 대한 막연한 후회, 이 모두는 지금 이 시간 나만이 곱씹고 있는 상념은 아닐 듯 싶다. 초저녁에 동쪽 산 위로 떠올랐던 보름달이 어느 덧 중천에 이르렀다. 모처럼 둥근 달이 천지를 굽어보고 있으니 고향을 등지는 서러움과 아쉬움이 훨씬 덜하다. 오늘 고향 마을 어귀에서 처다보는 보름달은 유난히 밝고 크다. 그러나 저 달도 내일이면 다시 기울기 시작하리라.

( 2007. 9 )
2007-10-13 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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