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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夜斷想
 작성자 : 최재운  2007-10-13 22:37:33   조회: 1635   
秋夜斷想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 곳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방충망도 있고 이중창도 있는데 무슨 재주로 집 안에까지 들어왔을까. 그뭄이 가까운 한 밤중 은은한 달빛 속에 거실 창문턱에 가만히 엎드려있는 귀뚜라미를 발견하곤 문득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귀뚜라미가 거실까지 진출했으니 계절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와있음이 분명하다. 뜻밖의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뒷굼치를 들고 얼른 서재 쪽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지켜보았으나 도무지 울려고 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주위가 낯설고 여건이 맞지 않아 울기를 포기했는가 보다. 분위기를 익히고 경계해야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울기 시작하리라.

시절의 변화와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주는 것이 어찌 귀뚜라미 뿐이겠는가. 사방천지에서 짙푸른 녹음을 자랑하던 나무며 풀도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가로수 나뭇잎에도 붉고 누른 기색이 완연하다. 일찍이 주희(朱熹)는 이 맘 때 흔히 회자(膾炙)되는 권학문(勸學文)에서 세월의 덧 없음을 엄중 경고하였다. 지당의 풀잎에서 봄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섬돌 앞의 오동잎은 이미 가을 냄새를 풍긴다고 했으니 -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 어찌 세월이 무상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같은 집 마당과 연못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풀잎과 나뭇잎 마저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다. 자칫 앞뒤를 모르고 허둥대다가는 세월은 사정 없이 마구 흘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허리가 굽고 눈도 침침해진다.

곰곰이 따져보면 애초에 세월을 탓한다는 것이 부질 없고 우스운 일이다. 시간이란 것이 언제 우리 인간들의 허락을 받고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붙잡을 려고 애를 쓰고 발버둥을 쳐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시간이란 어차피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정해진 우주질서와 자연법칙에 따라서 쉼 없이 흘러가기 마련인 것이다. 허깨비 같기도 하고 섬광처럼 부질 없기도 한 것이 시간이다. 덧 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 내 인생이 아니든가. 바람처럼 일순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라서 중심을 잃고 허둥대다가는 부지불식간에 훌쩍 흘러가 버린다. 세월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슬기롭게 대처하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준비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가을이란 겨울의 예고편에 지니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수식하고 미화한다 하더라도 가을은 역시 슬프고 외롭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계절이다. 특히, 타관 객지에서 홀로 지새우는 가을밤이란 나그네로 하여금 뼈속까지 시리게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처절한 외로움으로 몸부림치게 만든다. 오죽했으면 학덕높은 최치원(崔致遠)마저 객지에서 가을밤을 맞이하면서 외톨이 나그네의 외롭고 나약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을까. 그 또한 우리와 오장육부가 똑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운(孤雲) 선생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에서 만리타향에 홀로 남겨진 나그네의 외롭고 서글픈 심사를 은근한 필치로 절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오직 쓸쓸히 읊어 보나니
世路少知音 세상엔 날 알아주는 이 별로 없구나
窓外三更雨 창 밖엔 야심한 시각 떨어지는 빗소리
燈前萬里心 등잔 앞에는 만리로 내달리는 이 마음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주위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들끓어도 인간이란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가을 객창의 고적함이야 말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견디어 내기 정말 어려운 일이다. 풀벌레 소리 요란한 가을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향에서 홀로 이겨내야 하는 기나긴 가을밤의 외로움은 고역 중의 고역임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최치원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은 고운(孤雲)이라는 그의 호에서부터 이미 운명적으로 타고난 일인지도 모르겠다. 멀리 중국 땅에서 문명(文名)을 드높이 날리며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도 인간 본연의 속성은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秋菊有佳色 가을 국화 빛이 아름답기만 하여
裛露掇基英 이슬 가득 머금은 꽃잎을 따서
汎此忘憂物 근심 잊게 하는 술에 띄워 마시니
遠我遺世情 속세를 떠난 마음 더욱 깊어지누나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라는 작품의 서두이다. 속세의 풍진을 떠나 고원(高遠)한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조풍농월(嘲風弄月)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던 시인의 고고한 기품이 글속에 잘 녹아있다. 그가 구가(謳歌)했던 무욕(無慾)의 경지와 속탈(俗脫)의 인생관이 적나나하게 표현된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는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면서 인간 삶의 본질을 캐내고 진실한 영혼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도인(道人)다운 면모는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가을과 국화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여기에 술이 더해지고 시인 자신이 가세(加勢)함으로서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국화는 늦은 가을 모든 꽃이 다지고 난 다음 모진 서리를 이기며 피어나서 고결하고 청순한 풍모를 한껏 뽐낸다. 산하를 원색으로 물들이며 온갖 교태를 다 부리던 꽃들과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고 찬기운이 대지를 뒤덮을 때에 등장하여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무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도 국화의 높은 기개(氣槪)는 좀처럼 꺾일 줄 모른다. 날씨가 추워지고 서리가 내릴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늠름해지는 것이 국화이다. 사람들은 국화의 우아하고 고결한 기품을 높이 평가해서 오상고절(傲霜孤節)이란 말로 칭송했다. 절개와 지조를 생명처럼 중히 여겼던 선비들이 국화를 가까이 하고 그 고매한 품격을 닮을려고 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걸출한 시인 유장경(劉長卿)도 추운령(秋雲嶺)이라는 작품에서 가을날 저녁나절 석양에 묻힌 산골의 적막하고 쓸쓸한 정취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노래했다. 여기서 우리는 구름과 안개가 그리는 변화무쌍(變化無雙)한 풍경에 흠뻑 취한 시인을 본다. 강과 산, 그리고 석양이 서로 어우러져 멋지게 펼치는 신비스러운 조화에 넋을 온통 빼앗기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도 시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스스로 이미 자연과 동화(同化)되어 탈속입신(脫俗入神)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선계(仙界)인 셈이다. 시공(時空)을 이미 초월한 바 구태여 시간과 장소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山色無定姿 如烟復如黛 산색은 정해놓은 자태가 없고 안개가 그려놓은 눈썹을 닮았네.
孤峰夕陽後 翠嶺秋天外 석양 아래 봉우리 외롭고 가을 하늘 저 멀리 고갯마루 푸르구나.
雲起遙蔽虧 江回頻向背 구름 뭉게뭉게 낮은 곳 감싸고 강물 굽이굽이 산 뒤로 숨었네.
不知今遠近 到處猶相對 얼마나 가까이 온 것일까 가고가도 산은 여전히 그 산이로다.

가을을 두고 결실의 계절이니 사색의 계절이니 하면서 한껏 추겨 세우지만, 곧 들이닥칠 암울한 회색빛 겨울을 떠올리는 순간 모든 흥은 사라진다. 여름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화려하게 치장하고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한다. 수확을 앞둔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넘실댄다. 풍성한 결실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지난 일년 간 유지해온 생명활동의 결산이요 마감이 아니겠는가. 가을의 근본 속성이란 역시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아쉬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색의 향연인 단풍도 겨울을 온전하게 나기 위해 나무들 스스로가 택한 보신책이요 자구(自救) 노력인 셈이다. 겨울을 눈앞에 두고 펼치는 서글픈 잔치요 몸부림일 뿐이다.

인간들이 가을을 맞이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가을이 되면 우리는 여름 동안 활짝 개방해 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닫기 시작한다. 기온 강하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에 드러내 놓았던 것을 감추고 덮기에 바쁘다. 이웃과 얼굴을 마주하여 서로 어울리면서 정겹게 나누던 대화의 창도 닫아버린다. 개방적이던 생활방식은 날씨가 서늘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폐쇄적으로 바뀐다. 각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세상과의 교류를 차단한다. 바깥 세계와 소통하던 창문을 하나 둘 폐쇄하여 교통을 끊는다. 스스로 생활공간을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집 안에서도 안방과 거실, 작은방과 큰방 사이의 문을 닫는다. 감옥 속에 또 다른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나태해질 것이다. 기온이 달라지고 날씨가 바뀌고 산천의 모습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스스로를 추스르며 생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꽃이 피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한다. 이 모든 것이 계절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자극이요 교훈이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무덤덤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계절의 변화가 가져다 주는 신선한 충격이 있어 인간은 발전하고 진화(進化)하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거실까지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적막한 가을밤, 가늘지만 단호하고 청아하게 울고 있는 귀뚜라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유난히 선명한 음색이 가슴 깊숙히 파고든다.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 거실에서 만났던 그 녀석이 틀림이 없다. 어렸을 적 이슥한 가을밤 캄캄한 뜰에서 구슬피 우는 귀뚜라미가 궁금해서 가만가만 숨죽이며 찾아가 보았던 기억이 난다. 토담집 섬돌 밑 으쓱한 구석 어디에선가 숨어서 울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뚝 거치곤 했다. 그 신비스러운 소리에 매혹되어 여러 번 찾아 가 보았지만 소리의 주인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늦은 밤 그 귀한 손님이 스스로 집 안에까지 찾아왔으니 신기하고 기특하다.

뜻밖의 진객을 맞아 잠을 쫓고자 커피까지 마셔가며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지켜보기로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귀뚜라미는 지칠 줄도 모르는가 보다. 자정을 훌쩍 넘겼는데도 도대체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이쯤에서 내가 먼저 항복할 수 밖에 없다. 잠자리에 들기는 하지만 애절하고 청아한 그 소리를 꽤 오래 들었으니 혹시 꿈속에서 그 녀석을 다시 보게될 지 모르겠다. 내일 아침이면 녀석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없겠지. 그래도 이제 미련을 버리자. 그에게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값진 시간이 부여되었을 터이다.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짧은 생애에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그저 가만히 놔두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의 배려일 듯 싶다.


( 2007.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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