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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과 에스메일
 작성자 : 최재운  2007-11-04 11:07:06   조회: 1617   
이메일과 에스메일


아뿔싸! 오늘도 깜빡했구나. 벌써 사흘 째다. 진작 보냈어야할 엽서를 품속에 넣고 정신없이 허둥대다 보니 구겨져 엉망이다. 내일까지 행사 참석여부를 알려주어야 하는데 매일 잊어버려 오늘에 이르렀다. 간단하게 가부만을 표시하여 보낼 수 있게 회송용 엽서를 우표까지 붙여서 함께 넣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일이지만 지극히 합리적이다. 기한 내에 통지하여 행사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주는 것이 도리이다. 내일 아침 일찍 발송하더라도 당일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초대해준 성의는 정말 고맙지만 한창 바쁜 때라 참석하기 어렵다. 동봉한 엽서 대신에 별도 엽서를 택했다. 불참 사유와 함께 축하인사를 적고 일찍 회신하지 못한데 대한 사과의 말씀도 담았다.

일과 중에는 엽서를 떠올릴 마음의 여유가 없다. 잊고 지내다가 퇴근하여 옷을 갈아 입을 때 생각난다. 한 쪽 귀퉁이가 호주머니 바깥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어 피곤한 눈에도 쉽게 들어온다. 평균수명이 80세를 넘나드는 오늘날 회갑을 겨우 몇 해 앞둔 젊은 나이에 벌써 이렇게 잘 잊어버리니 낭패다. 누가 알겠는가. 이게 혹시 건망증 초기증상은 아닌지. 팔순 언저리의 연세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민망하다. 어린 나이에 건망증이라니 가당치 않다. 온전한 정신력으로도 헤쳐 나가기 힘겨운 세상이 아닌가. 아무튼 늦기는 했지만 행사일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았으니 내일에는 꼭 보내야할 텐데 또 잊어버릴까 걱정이다.

따지고 보면 제 때에 회신하지 못한 것이 꼭 내 탓만은 아닌듯 싶다. 그 많던 우체통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유심히 살펴봐도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총기가 옛날 같지 않는데다 우체통까지 쉽게 눈에 띄지 않으니 엽서 한 장 보내기가 이렇게 어렵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도 있지만 평소에 흔하던 것도 막상 소용이 있어서 찾으면 보이지 않으니 희한한 노릇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요한 우편물은 아내에게 맡기는 수가 많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라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시한을 넘기는 일은 없다. 달리 하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성가신 짐을 지운다.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불평불만이 없으니 그저 고맙고 신통하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엽서 한 장이나마 직접 써본 지 오래다. 첨단 정보화시대를 살다보니 펜이며 연필, 지우개 등 필기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쓰고 또 지우며 밤을 새우던 일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가끔 편지쓸 일이 있을 때 이메일(e-mail: electronic mail)이라는 편리한 도구의 힘을 빌린다. 우선 손에 잉크를 묻히지 않아도 된다. 초안을 작성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수시로 꺼내 가필 정정한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기한 보관할 수 있다. 편지 한 통 쓰면서 수 십장씩 종이를 허비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흔히 재래식 우편을 에스메일(s-mail: snail mail)이라 한다. 번개같이 빠른 이메일에 비해 달팽이(snail)가 기어가듯 아주 느리고 답답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메일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신속성을 꼽을 수 있다. 보내는 순간 상대방에게 배달된다. 수신 여부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우체국을 통하면 2,3일 걸려야 할 편지가 클릭하는 순간 곧바로 전달되니 정말 경이롭다. 밤잠을 설치며 편지를 쓰고 우체국까지 가서 발송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우표는 물론 종이나 연필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이 바쁜 시대에 시간, 노력, 물자를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누가 힘겹게 글을 쓸려고 하겠는가. 아무런 준비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만 두드리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가. 더구나 같은 편지를 한꺼번에 수 십 혹은 수 백 통씩 보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자신이 보낸 편지 뿐만 아니라 받은 편지까지 모든 것을 무기한 저장해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메일이 장점만 지닌 것은 아니다. 풋풋한 인간미와 따뜻한 감동이 없다. 기계의 힘을 빌어 바쁘게 쓰는 글이라서 종이 편지에 비해서 품격이 떨어지고 삭막하다. 구체적인 실체가 없이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르는 허상일 뿐이다. 허공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이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도록 꾹꾹 눌러가며 쓴 편지와는 풍기는 맛과 향이 다르다. 편지는 주고 받는 사이에 기다리는 설레임이 있다. 이메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또 다가오니 싱겁기 짝이 없다. 깊은 고뇌 없이 즉흥적으로 쓴 글이 쉽게 배달되고 가볍게 읽히니 감동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종이 편지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하고 미묘한 정서를 느낄 수 없어서 밋밋하고 건조하다.

문득 까마득한 옛날 미국 유학시절이 생각난다. 출국하기 전 우리 부부는 열흘에 한 통씩 서로 편지를 주고 받기로 약속했다. 일 년 가까이 체류하는 동안 아내의 글을 기다리며 속을 태우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저 밑바닥이 아련히 저려온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우편함부터 확인하는 일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다음 편지가 도착할 때까지 최근에 온 편지를 품속 깊숙히 넣고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아내의 편지 덕분에 이역만리 타국에서의 고달픈 유학생활도 무사히 견딜 수 있었다. 귀국할 때 그 편지 뭉치를 제일 먼저 챙겼음은 물론이다. 당시 편지가 바탕이 되어 재작년 이맘 때 책이 나왔다. 틈틈이 써 두었던 생활주변의 이야기가 보태어져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그 때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회한의 삶을 살았다. 아쉬움과 그리움 등 복잡하고 처절한 심정을 편지지 위에 마구 쏟아 부었다. 우리들이 흘린 눈물과 한숨이 편지지 곳곳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어찌 즉흥적으로 써 내려가는 이메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상사 힘든 고비가 닥칠 때마다 다시 꺼내 읽는다. 누렇게 빛이 바래긴 했지만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배이다.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편지를 대한다. 나태해져가는 스스로를 다시 다잡는다. 여백과 행간에 진하게 배어있는 깊은 뜻을 곰곰이 되새긴다.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고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 힘든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게 해준 아내가 더 없이 소중하다.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다보니 짧고 간단한 것을 선호하고 길고 복잡한 것은 멀리하게 되었다. 인생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무거운 글은 잘 읽히지 않는다. 그저 재치가 넘치고 부담 없이 읽고 한바탕 웃어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글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희미한 등잔 밑에서 뭉툭한 연필로 수 없이 쓰고 또 지워 편지 한 통을 완성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밤을 하얗게 새우며 쓴 편지를 설레는 가슴으로 부치던 일도 흔하지 않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편지를 대필해주던 사람이 성업한 적이 있었다. 각기 다른 용도와 상황에 적절히 맞춘 모범답안도 있어 결혼 적령기의 청춘 남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별한 애호를 받았다.

편지 대필은 특히 군대에서 흔했다. 문제는 그것이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 책임져야 한다. 일이 잘 풀려 상대편 아가씨가 면회라도 오는 날이면 대필 의뢰자와 면회객 사이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판이 깨지는 수도 있었다. 문맹자가 사라지고 국민 대다수가 컴퓨터를 다루고 이메일을 운용할 줄 아는 오늘날 이와 같이 답답한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기다리지 못하고 뮈든지 신속하게 해치워야 하는 조급증이 이메일 시대를 앞당긴 것이다. 편지 한 통 보내놓고 차분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줄 아는 여유가 아쉽다. 요즘은 신세대 장병들도 종이 편지 대신 신속하고 짤막한 이메일이나 문자 메세지를 즐겨 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소위 엄지족들은 문자 서비스를 이용할 때 희한한 기호를 즐겨 쓴다. 정통 국어 어법에 맞지 않는 글도 허다하다. 맞춤법, 정서법은 물론이고 띄어쓰기도 지켜지 않는다. 무엇이든 편하고 쉬우면 그만인 풍토가 우리 사회를 완전히 점령해버린 것이다. 글이 가벼우니 인간관계도 덩달아 삭막하고 경박해질 수 밖에 없다. 친구간의 의리와 신의도 헌 신짝처럼 쉽게 저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니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남여간에도 깊이 사귀지 못하고 곧잘 헤어진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 버리는 말과는 달리 글은 지속성을 지닌다. 글을 쓸 때는 훨씬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잘못 쓴 글은 세상 구석구석을 떠돌아 다니면서 속수무책(束手無策)인 주인을 마구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메일이 있어 세상이 편리해졌지만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진득한 맛이 적고 순간적이고 빨라서 구수하고 곰삭은 향취를 느낄 여유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메일이라는 참으로 놀라운 도구가 베푸는 혜택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마음껏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메일이 아무리 편하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전통적 우편을 활용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편지를 보내놓고 하루하루 날짜를 짚어 가며 가슴을 태우며 기다리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니던가. 오랜 세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풍습이 송두리째 변하고 있으니 편지쓰는 일인들 온전하겠는가. 그래도 온 정성을 다 쏟아 밤을 새워 편지지와 씨름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리운 것을 어찌하랴.

상의를 벗는 순간 온 종일 호주머니 속에 갖혀있던 엽서가 방바닥으로 떨어진다.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부쳐야한다. 이번에는 아내의 신세도 질 수 없게 되었다. 중요한 행사가 있어 어제부터 집을 비우고 없다. 지난 여름 행정자치부에서 실시한 공무원문예대전에 입상한 기념으로 그림엽서를 한 묶음 받았다. 작품의 소재인 다람쥐와 숲을 배경으로 내 사진까지 넣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엽서를 받은 지 석 달이 넘었지만 아직 단 한 장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써 보내는 맞춤엽서이니 그 의미가 각별하다. 이메일을 이용하면 지금 당장 회신할 수 있겠지만 정중하지 못하고 가벼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내일 아침 출근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우체통부터 꼭 먼저 찾고 볼 일이다.


( 2007. 11 )
2007-11-04 11:07:06
211.xxx.xxx.130


작성자 :  비밀번호 : 

libero (125.xxx.xxx.85) 2007-11-05 13:18:23
자유게시판에서 뜻밖에 이렇듯 정겨운 이야기를 읽게 되어 기쁩니다. 그 예쁜 맞춤엽서는 다 누구에게 보내실 건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재미난 이야기들 간추려 회원칼럼으로 올려 놓으시면 더 많은 이들이 손쉽게 열어 보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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