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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母子
 작성자 : 명선행자  2008-12-27 03:52:27   조회: 1361   
어떤 모자母子

향불을 올리고 영전에 두 번 절하고 일어나 나이가 한참 아래라 나를 조카님이라 부르는 상주에게 절을 하고 나서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곡한 조문의 말씀을 드렸다.
“아저씨, 오래 편찮으신 할머니 모시느라 큰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제 할머님 좋은 곳에 가셨으니 큰 짐을 벗으셨네요.”
89세 망구望九의 천수天壽를 살고 가신 할머니를 두고 언필칭 호상好喪이라 할만도 하거니와 누구 하나 호곡號哭을 하거나 눈귀가 젖어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특별히 그렇게 슬프다거나 쓸쓸한 상가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잠자리에 들어 낮에 다녀온 조문 생각에 잠을 빼앗기고 뒤척이게 하는걸까?

전쟁은 끝났으나 국토는 피폐할대로 부서지고 봄이면 춘궁春窮과 절량농가絶糧農家나 보릿고개가 일상사였던 어려운 시절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밖으로부터 받는 식량원조에 많이 의지하여 연명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때 전라도 ‘아짐씨‘들이 봄이 되어 농사철이 되자 좀 더 나은 고장으로 떼를 지어 농사일 품을 팔고자 북상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품을 팔아 돈을 벌기보단 춘궁기를 그렇게라도 타고 넘으려는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즘 부자나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기 위해 국경을 넘어 북상하는 멕시코 불법입국자들의 흐름과 비슷하지만 규모나 차원이 다른 일시적 전후 한국의 현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 발길이 궁벽窮僻한 우리 고향 충청도에까지 뻗치게 되어 많은 농사일을 남에게 시킬만큼 넓은 농토도 품을 살만한 여력도 없는 우리 가난한 마을에도 밭 매는 품팔이 아줌마 몇 분이 들어오게 된다.
마침 이 마을에 딸 하나만을 두고 부인의 산도産道가 끊겨 뒤를 이을 후사後嗣를 걱정하던 중년의 어른 한 분이 사셨는데, 그 아짐씨들 중 한 분과 어찌어찌하여 정분을 통했을까 아니면 아들을 하나만 낳아 달라는 간곡한 ‘씨받이’ 호소를 받아들인 것인지는 몰라도 결국 농사일이 한 풀 지난 뒤에 다른 아짐씨들이 마을을 떠날 때 그 아짐씨만은 전라도 고향으로의 귀환을 접고 그냥 뒤에 주저앉아 두분이 살림을 차리게 된다.
살림이라고 해도 넉넉지 못한 집의 한 지붕 밑에서 두 마나님이 서방님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좀 편편치 못한 동거가 되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살을 섞고 살게되는 이 일이 꼭 사람의 뜻뿐 아니라 어찌 기구한 팔자의 인연소기因緣所起가 아니었으랴.
그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남자의 가장이라는 권위와 아낙의 부덕婦德이란 허울로 용납되는 세상이긴 했지만 받아드린 마나님 입장에선 넓은 아량에서라기 보단 아들 못 낳아 준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허물(?)을 쓰고 자책하는 뜻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끊기지 않고 이어야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드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해서 이 집에 머지 않아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옥동자의 고고지성呱呱之聲이 울리는 경사가 벌여진다. 그러나 천하를 다 얻은 듯한 생남의 기쁨도 잠시, 이 무슨 기운奇運일까 그 전라도 아짐씨는 낯선 땅에 자기 분신을 한 가문의 대를 이을 씨로 남겨두고 곧 세상을 뜨게 되었고 그 아기는 생모의 품을 모른 채 ‘큰 엄마’의 손끝에서 자라게 된다.

오늘의 망자인 ‘독안이 댁’ 할머니와 상주인 아저씨가 바로 이 피가 섞이지 않은 모자지간이다.
인생을 일러 생사우비고뇌生死憂悲苦惱라 하거니와 그 첫 대목인 세상에 태어나는 일대사一大事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닥쳐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누겁累劫에 걸친 업보業報와 인연의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니랴.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하지만 이렇게 기막힌 사연을 지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와 그를 받아 기르며 평생의 삶을 나누어 온 두 사람이 이제 그 물이 진한 피가 되어 엉킨 시절인연의 끈을 놓고 작별을 고한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길에 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엔 많은 봉별逢別의 곡절이 얽혀든다. 그 기막힌 인연을 받아들여 순응하고 잘 자라서 일가를 이루어 핏줄의 대를 이으며 넉넉지 못한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기를 길러준 ‘엄마’를 지극히 봉양하며 더구나 그 말년에 여러 해 동안 치매까지 겹친 할머니 병관을 극진히 하고 산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늘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돌밭에 떨어진 풀씨 같은 핏덩이를 받아 ‘내 새끼’로 품에 보듬고 모정을 쏟아 부워 길러주신 할머니와 그 고마움을 효도로 갚으신 아저씨 두 분 모자의 삶의 구비를 짚어보면서 천국이나 극락이 있다면 오직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자비심慈悲心으로 세상을 품고 보시布施를 묵묵히 베풀며 살다 가는 이런 착한 중생들이 가야 할 곳이 아니랴 싶다. 이미 망자는 차생의 다한 인연의 매듭을 풀어놓고 극락왕생 열반涅槃의 문에 들어서고 계실 것을 믿으며 거듭 명복을 빌고 오지 않는 잠을 다시 청해 본다.
2008-12-27 03: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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