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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거짓말 사용법 - 『진실된 이야기』
김이경 2009년 09월 21일 (월) 06:07:48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란다고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적엔 거짓말은 나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믿음이 흔들리더니 요즘엔 거짓말을 좀더 잘했으면 싶기도 합니다. 사통팔달이 된 지하철 때문에 더 이상 차가 막혀 늦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때,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부쩍 늙어버렸을 때, 치료법도 없는 중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문병할 때, 빈약한 거짓말 실력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살다보면 후유증 없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특히 솔직함을 내세워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거짓말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제가 아는 분은 면전에서 대놓고 “예쁜 얼굴은 아니야.” “성격이 못됐어.” 하고 ‘정직’하게 말하곤 하는데, 속이 좁은 탓인지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자주 만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된다고, 못생겼으면 못생겼단 말을 듣고 못됐으면 못됐단 말을 들어야지 왜 거짓말을 바라느냐고 꾸지람하는 분들, 부디 소피 칼의 사진 소설책 『진실된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시 돋친 직언을 서슴지 않는 분들과 서툰 거짓말로 오히려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분들도 꼭 읽어보세요. 거짓말도 예술적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확인하실 겁니다.

1953년생인 소피 칼은 일찍이 프랑스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을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진작가입니다. 제가 그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지난 8월 영월에서 열린 동강 국제사진제에서였습니다. 연필로 그린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화는 여기저기 면도날로 잘려져 있었고, 그 옆에 작품 설명치고는 긴 글이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정오 사이에 나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매일 한 남자가 맨 앞줄 왼쪽 끝자리에 앉아 세 시간 동안 나를 데생했다. 그러다 정확하게 정오가 되면 그는 호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세심하게 찢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짝 끼침과 동시에, 본 적 없는 작가에 대한 연민이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누드모델을 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을 젊은 여성과 그녀가 겪었을 끔찍한 고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작품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이상하지요? 뭔지 모를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며 전과 다른 느낌으로 작품을 보게 되는 겁니다.

설치미술가이면서 사진작가인 소피 칼은 사진과 글이 함께하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그녀의 작업을 ‘사진-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8점의 사진이 실린 이 책 역시 사진소설집으로, 독특한 것은 여기 담긴 이야기들이 모두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자서전인 셈이지요.

소피 칼은 아홉 살 때부터 2002년 마흔아홉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열한 살 때의 도둑질, 스트립쇼 걸로 일하던 20대, 이혼으로 끝난 남편과의 추억까지, 대개의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을 그녀는 나체 사진까지 곁들여 고스란히 내보입니다. 너무 솔직해서 읽는 사람이 낯이 붉어지는 그 이야기들은 때론 웃음을, 때론 쓸쓸한 공감을 자아냅니다.

   
“사춘기 때 나는 납작했다. 친구들을 흉내 내려고 브래지어를 샀지만, 물론 나는 제대로 잘 이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별안간, 1992년에 가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맹세하건대 스스로, 어떤 치료도 받지 않고, 또 어떤 외부적인 개입도 없이 기적처럼. 난 의기양양하긴 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성과는 20년 동안의 좌절과 갈망, 몽상과 탄식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불가사의한 가슴’ 중에서1) )

   
“… 내가 바라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지 나는 몰랐다. 그는 나를 떠나버렸다.
‘한순간은 늘 우리보다 앞서 있어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잡을 수도 없고, 그 순간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도 없다네.’”(‘타인’ 중에서)

이야기와 함께 실린 사진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물입니다. 사진이 없었다면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그렇게 쉽게 믿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각종 물건과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 있는데 어떻게 의심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그녀의 사진은 별다른 조작이나 장식이 없는, 그래서 이게 정말 사진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아주 소박한 모습인데요.

그 모든 게 의심스러워지는 건 책 뒤에 실린 옮긴이의 글을 읽고서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소피 칼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규칙: 허구를 창조해내는 것. 자의적인 상황을 고의로 연출해내는 것.” 이 말처럼 그녀는 자신이 정한 예술의 규칙을 위해 작품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술에 헌신합니다. 삶을 허구로 만든 것이지요.

사진작가가 된 초기에 카메라를 들고 낯선 사람의 뒤를 밟았던 그녀는, 몇 년 뒤 직접 탐정을 고용해 자신을 미행하고 사진을 찍게 합니다. 이 책에도 그녀가 등장하는 사진들이 여럿 나오는데, 이런 작품들은 독자에게 엿보기의 쾌감을 주는 한편 스스로가 관음증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중의 엿보기를 통해 대상과 주체의 경계를 흔들어버립니다.

처음에 독자는 작가의 솔직한 사생활을 보고 있다는 데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사생활이란 것 역시 작가에 의해 제작된 것이며, 작가는 독자의 시선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심이 생깁니다. 과연 이것이 진짜일까, 믿어도 될까? 그러나 속았다고 단정하기엔 이릅니다. 작품을 만든 것은 작가지만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의식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건 작가와 독자 그 둘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속는 것은 독자만이 아니라 작가이기도 하며, 가짜인 것은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이기도 합니다.

소피 칼이 ‘진실된 이야기’라고 털어놓은 인생사 중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이란 작품에는 그녀를 모델로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걸 보면 칼이 스트립쇼 걸로 일한 건 딱 하루뿐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해프닝이었다는 건데 이 책에 실린 내용과는 달라서 좀 어리둥절합니다. 하지만 ‘속았다’는 배신감은 없습니다. 오히려 순식간에 읽어버린 이 얇은 책에서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게 되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진짜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는 하루에 6번, 여자는 3번 거짓말을 한답니다.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은 남녀 모두 “아무 일 없어, 괜찮아!”이고요, 남자의 거짓말 3위는 “그렇게 입으니까 당신 엉덩이도 별로 안 큰데.”랍니다. 얼마나 여자들에게 시달렸으면 그 말이 3위에 올랐겠어요. 생각해 보면 이런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입니다. 정말 괜찮기를 바라면서 서로 거짓말을 주고받는 인생, 그게 우리네 삶의 진실이라면 여섯 번이건 세 번이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1) 사진의 하얀 박스는, 한국어판을 위해 작가가 특별 제작한 장치입니다. 한국의 정서를 고려해 한국 출판사에서 부탁했다는데, 한국의 정서란 게 뭔지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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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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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12.XXX.XXX.244)
민족적 차원이나 공적인 차원에서의 거짓말은 안되지만
멋집니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의상이 잘 어울립니다!
사소한 차원에서의 거짓말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워있는 환자에게 전보다 더 좋지 않다는 솔직함은 금기니까요.
그래서,
적당한 거짓말은 권장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청문회장에서의 거짓말은 극구 사양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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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3 15: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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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 (222.XXX.XXX.130)
무식함과 편견,교만함,특권의식을 거짓과 가면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펼쳐 놓은 위선이 풀풀 풍기는 글을 읽다 보면 확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아하! 님의 글은 절대 아닙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들여다 보다 우연히 운이 좋아 님의 귀한 글 읽고 반갑다는 징표를 남깁니다.
답변달기
2009-09-22 22: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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