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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임철순 2009년 09월 25일 (금) 07:36:04
곧 물러날 한승수 국무총리가 23일,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하면서 지난해 2월 취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한 총리는 무슨 생각에선지 두꺼운 노트를 갖고 와 보여주기까지 했다는데, 그 노트가 벌써 6권째라고 했답니다. 일기에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화는 물론 각료 인선 뒷얘기, 정부회의 발언록이나 발표문, 주요 오찬ㆍ만찬 메뉴 등의 자료까지 두루 망라돼 있다고 합니다. 한 총리는 “이걸 열면 뉴스 100건은 나올 것”이라는 말로 기자들을 감질나고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늘 바쁜 국무총리가 매일 밤 1~2시간씩 만년필로 직접 일기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총리야 나처럼 정신 잃을 정도로 술 퍼 마시는 일이 없겠지만, 그래서 일기를 쓰려도 쓸 수 없는 경우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매일, 그것도 자필로 꼼꼼하게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아울러, 한 개인의 일기를 위해 여러 사람이 돕거나 동원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금년 봄에도 나는 일기 때문에 크게 놀란 일이 있습니다. 출판사 대표인 대학 후배가 2004년 한 해 동안의 일기를 800쪽이 넘는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열린책들 홍지웅 대표의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라는 책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리고 그가 무서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기록해 놓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걸 공개할 용기를 갖게 됐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삶과 출판에 관한 일, 사람들과의 만남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일기를 날마다 쓰지 못하는 바람에 2~3시간 걸려 쓴 주기(週記)로 1주일 치를 복원한 경우도 있지만, 그는 참 성실하고 치열하게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28~1987)의 일기를 번역 출판키로 했던 홍씨는 아들이 번역을 끝낸 날 자신도 1년 동안 앤디 워홀처럼, 아니 그보다 더 세세하게 일기를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1976년 11월부터 1987년 2월까지 7,000매가 넘는 일기를 썼고, 홍씨는 1년 동안 5,000매가 넘는 일기를 썼습니다.

홍씨의 2004년 일기는 책으로 나오기까지 5년 이상 걸렸는데, 아들 예빈씨가 번역한 <앤디 워홀 일기>는 퇴고하고 가다듬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아버지의 책보다 5개월 늦게 출간됐습니다. 홍씨 부자는 서로 약속한 것을 ‘완성된 형태’로, ‘공개적으로’내놓기로 한 다짐을 지켰습니다. 일기와 책을 매개로 한 부자간의 우정과 협력이 보기 좋고 부러울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웅과 예빈, 이 부자의 이름은 열린책들이 독점 출판해온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개미> 등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니 홍씨 가문의 경사이면서 한국인들에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무섭도록 기록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대체 뭔가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홍씨의 책 말미에는‘2004년 나를 행복하게 했던 사람들’이라는 명단이 있고, 거기에 내 이름도 들어 있긴 하지만 일기의 어느 대목에 내가 등장하는지, 뭐라고 언급돼 있는지 제대로 찾기도 어려우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나와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마저 흐릿할 뿐입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일기를 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역사상 훌륭한 저작이나 위대한 지적 성취는 결국 모두가 일기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일은 모질고 끈질긴 열성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기록 중에서는 柳希春(유희춘ㆍ1513~1577)의 <眉巖日記(미암일기)>나 兪晩柱(유만주ㆍ1755∼1788)의 <欽英(흠영)>이 유명합니다. 유만주의 일기는 13년치 전부가 남아 있고, 유희춘의 일기는 11년치가 남아 있습니다. 2006년에는 영ㆍ정조 대의 중급 무관이었던 盧尙樞(노상추ㆍ1746~1829)가 68년 동안이나 쓴 일기가 <노상추일기>로 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들 일기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잘 알 수 있으니 일기는 개인과 가문의 역사이면서 사회의 일지가 되는 게 틀림없습니다.

일기를 쓰면 허투루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기록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의 생활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기에서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할 수 있을까? 100% 솔직할 수는 100%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출판을 전제로 하거나 공개를 의식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8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 일부를 보도를 통해 읽었을 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쓴 대목이 많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홍지웅 대표의 경우도 실명 공개에 따르는 문제점 때문에 스스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삭제한 데 이어, 몇 사람에게 일독을 요청해 그들의 조언대로 또 무차별 삭제를 한 내용이 많았고, 그 바람에 출판이 늦어졌다고 합니다.

일기를 쓰는 것에는 어릴 적 경험도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경험한 바 있겠지만 초등학교 때 가장 싫은 숙제는 역시 일기 쓰기 아니었습니까? 더구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집안의 일과 자신의 생각이 공개되는 게 싫은 경우, 일기는 정말 죽도록 하기 싫은 숙제입니다. 그런 아이에게는 일기가 본심을 감춘 거짓말 기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방학숙제로 일기장을 냈다가 낭패와 창피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숙제를 한 게 학급에서 나 혼자 뿐이어서 아이들의 좋은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남에게 알리기 싫은 집안 일까지 다 써 넣은 일기였는데….

그런 기억 때문에 지금도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허랑방탕이라는 말은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하다는 뜻입니다. 주색 중에서 색은 빼고, 내가 허황되고 규모 없고 대책 없이 사는 것은 대충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개 글을 마무리할 때 흔히 하는 다짐처럼 “이제부터 열심히 일기를 쓰도록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좌우간 일단,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우러러 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어느 날부터 성실하게 삶을 기록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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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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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완 (211.XXX.XXX.129)
무엇으로 홍지웅대표를 행복하게 해주었는데요..
일기를 쓰면 허투루 살지 않게 된다는데 100% 동의합니다.
일기를 100% 솔직하게 쓸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고,
DJ같은 위인들은 공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산되게
썼을 것이란 점도 맞다고 보고...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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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11:42:27
2 1
유수열 (211.XXX.XXX.129)
오래만이에요. 술 좀 아껴요. 수십년 동안 쓴 일기는 언제나 다시 읽어볼 자유로운 시간이 나에게 찾아 오려는지?
오늘은 일요일. 망월사에 산행을 약속한 아침이라 학교에 나와 화초를 가꾸고 임주필의 글을 음미하고 나의 지난날을 더듬어 보는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오. 좋은 글 많이 남기시오. 안녕히. 유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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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8 11:24:14
2 2
김윤옥 (210.XXX.XXX.228)
천경자씨가 월간문예지에 썼던 글들이 일종의 일기 형식이었는데 그 글을 읽으며 인간 천경자씨의 사랑과 애환이 짠~하게 전해져서 참 좋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저도 일기를 쓰리라 맘 먹은지 어언 40년, 그러나 아직 쓰지 못하고있습니다.
요 밑에 글을 쓰신 oh headam이란 분,-한 평생 거짓과 자신 광고에만 급급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이라 하셨는데 세계의 지도자들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을 혼자 폄훼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계가 인정하고 추앙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넓은 안목으로 보면 보이는 것을 우물안에서만 보면 당연히 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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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22:04:26
2 2
채길순 (121.XXX.XXX.16)
100%의 진실 아닌 일기를 100%의 흥미에 실어서 말씀을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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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6 06:26:22
2 2
oh headam (121.XXX.XXX.16)
일기를 쓰지 않는 저에게 군데군데 참 나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솔직한 일기는 비록 한 사람의 행적이라 하더라도 후대에 큰 재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보이기 위한 생각으로 쓴 것이라면, 그리고 솔직하지 않았다면
범죄나 다름 없다고 봅니다. 그것도 자신의 양심을 판 가장 치졸한 범죄라고 봅니다.
한 평생 거짓과 자신 광고에만 급급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가 공개되었다니,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김대중 대통령 어록(연설문 모음집) 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책이 4-5명이 근무하는 사무실에까지 배송된 사실은 이를 의심하기에 합니다.
일기의 명과 암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좋은 글을 주셨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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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6 06:23:18
2 2
김영수 (118.XXX.XXX.158)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일기를 한꺼번에 쓸때 날씨 쓰는것이 문제였지요.
열심히 일기를 쓰시겠다고 말씀 안 하시는것이 오이려 여유있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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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5 21:25:06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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