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입버릇 “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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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입버릇 “너 죽어!”

황경춘

2009년 10월 01일 (목) 03:25:26

얼마 전 시내에 볼일이 있어 집 앞 골목길을 가는데 골목대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아이가 나이 적어 보이는 꼬마를 뒤쫓아 오다 “너 서지 못해? 나중에 너 죽어”하고 헐떡거리며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15 분 지하철을 타고 가다 조금 전 목도한 그 광경을 머리에 떠올리며 저는 속으로 혼자 웃었습니다. 아득한 옛날 이 “너 죽어”라는 한마디로 큰 곤욕을 치를 뻔한 고향 선배에 얽힌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1945년 가을 저는 우연한 기회로 미 군정청 통역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징병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군 복무 중 해방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돌아와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구 10여 만밖에 되지 않는 경상남도의 작은 군이었지만 이곳에도 미 군정청의 분견대(分遣隊)가 진주하여 경찰을 비롯한 모든 군 행정(郡行政)을 장악했습니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에 구경 갔던 저는 통역 없이 온 그들 때문에 현장에서 고을 어른들에 징발 되다시피 떠밀려 결국 그들과 24시간 생활을 같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어느 날 늦은 밤 시간에 사무실을 찾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듯 붕대를 감고 상당히 흥분해 있었습니다. 놀란 것은 숙직당번인 미군 사병과 제가 그를 사무실 안으로 안내하자 그는 좀 더듬더듬 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일반 사건은 일단 경찰에서 접수하는 것이 통례였지만 노인이 흥분한 상태이고 영어로 부탁을 하니 안내병이 그를 육군중위인 군정관을 만나게 했습니다. 아직도 흥분상태에 있는 그는 분견대장을 보자 통역인 저를 통하지 않고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로 어떤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He say he kill me, kill me,"(그가 나를 죽인다고 해요)라는 말을 들은 중위는 무척 놀란 표정으로 저에게 사정을 들은 뒤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노인은 젊었을 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수년 일하다가 신병(身病)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으며 동네사람들로부터는 ‘하와이 노인’으로 불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묏자리 문제로 이웃동네 사람과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하와이 노인’을 돌려보낸 뒤 저는 한참동안 고민했습니다. 이런 경우 “너 죽어” 혹은 “죽여버리겠다”라는 말을 살의(殺意)없이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우리 언어습관과 묘지에 관한 풍수설에 따른 잦은 분쟁도 같이 설명해야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데 그때의 짧은 제 영어실력으로는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크게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뒤에 보고를 하면서, “죽인다”는 말을 가볍게 사용하는 우리 언어풍토(言語風土)를 불충분한 영어로 설명은 했으나 중위가 어느 정도 이해를 했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뒷날 경찰이 데리고 온 싸움 상대방이 놀랍게도 제가 다니던 일본의 대학 선배로서 지방의 유지이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약간 영어도 하는 이 선배의 설명과 진지한 태도를 보고 군정관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살의가 있는 협박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려 양쪽을 화해시켜 무사히 문제를 결말지었습니다.
잘못하면 이 선배가 살인미수 혐의로 간이 군법재판에 회부될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60 년이 넘는 옛날 이야기지만 이때 경험한 우리 언어의 과장된 용법, 정확성의 부족 내지는 애매한 관용용법(慣用用法) 등은 그 뒤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할 때마다 두고두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죽다’ ‘죽어’라는 어간에서 파생되는 말만 해도 “예뻐 죽겠어,” “배불러 죽겠어,” “죽도록 사랑해,” “대마(大馬)를 죽이다,” “죽자 살자” 등 우리나라 말에는 외국 사람이 이해하기엔 좀 힘든 용법이 많습니다.

물론 외국어에도 비속어(卑俗語)가 많고 우리나라 육두문자에 못지않은 욕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미친 년” “너 미쳤니” “혀 빠져 죽을 놈” 등 보통 회화에도 나오는 이러한 직설적 표현은 우리 자신이 듣기에도 거북할 때가 많습니다.

이 밖에도 근래에 와서 문법에 맞지 않게 문란해진 우리말이나 인터넷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서 사용되는 어법을 보며 시대 흐름에 따른 언어의 급격한 변천을 실감합니다.

또한 지하철 안에서의 회화나 스포츠 중계 해설자의 말에서 “너무” “너무너무” “역시” “정말” “진짜” 등의 단어가 그야말로 남발되고 있습니다. 학교 언어교육이 우리말 가꾸기는 물론 일상 대화의 순화에도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다비 (174.XXX.XXX.8)

선생님 글을 읽고 저도 반성합니다. 요즘 한국의 블로그와 웹에서 자주 한국언어와 접촉을 하다보니( 한국 비디오 영화) 무심결에 좋지 않은 언어들이 의식되어 있다가 뜽금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도 나중엔 황당하기도 하는데, 정말 앞으론 조심해야겠고
차라리 한국웹과의 거리를 두고 살아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물론 제가 조심해야 하는 제 문제입니다만..
오늘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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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1 12: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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