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발리에서 생긴 일
신아연 2009년 11월 02일 (월) 08:38:44
두 달 전 발리를 다녀왔습니다. 평소 여행을 자주 하는 처지도 아니면서 “내 생애 발리여행이 제일 좋았다”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때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발리가 아무리 이름난 관광지라 해도 오랫동안 호주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별 새로울 것도 없는 비슷한 풍광인 데다, 현지인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피상적으로 접하는 일은 거북하고 미안한 마음마저 갖게 해 여행하는 사람의 기분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여행지의 자연경관에 반한 것도 아니고 추억거리가 될 만한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유독 발리가 좋았던 이유는 말그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을 치러내느라 이른 조반을 먹기 무섭게 가이드의 깃발을 가열차게 따라다녀야 하는 패키지 관광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이곳만은 둘러봐야 한다’는 따위의 일말의 사전 계획도 없는 그저 텅빈 시간이 열흘간이나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기만 하면 될 뿐, 먹고 나서 서둘러 어디를 가야 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먹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작작한 마음으로 동네를 둘러본다거나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들과 풀뜯는 소, 낮은 토담 위에 올라앉은 닭들을 그저 빈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대견합니다.

가지고 간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던 탓에 책장을 넘기기가 오히려 수월했고 해야 할 일로 조급하게 쫓길 필요가 없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전에 없이 상대방과의 대화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누울 때는 눕는 것에만 집중하고 설 때는 오직 선 것만 생각하면 되는데, 누울 때 벌써 일어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과 정신이 혼탁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한 번에 한 생각씩, 한 동작씩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온전한 집중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온전한 집중력은 기분의 상쾌함과 생각의 명쾌함으로 이어지면서 심신을 단순하고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았는데, 둔탁하고 묵직했던 심상들이 예리하면서도 온화한 형태로 마름질되는 느낌은 흔한 말로 스트레스가 풀리고 재충전이 된다는 뜻과 같을 것입니다.

이름난 곳에서 사진을 ‘박기 위해’ 객지임에도 불과 한 이틀 사이에 수천 킬로미터 주행도 마다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지요. 여행 다녀온 사람에게 뭘 구경했냐니까 “단체 관광으로 바삐 돌아치느라 앞 사람 뒷통수만 보고 왔다” 거나 “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일단 사진을 뽑아봐야 알 것 같다”는 우스개가 단지 웃자고 만든 소리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쉰다’는 의미의 휴식과 휴가를, ‘하던 일은 멈추되, 또다른 무엇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심신을 가동시키며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대부분 3박 4일이나 길어봐야 5박 6일 정도에 불과한 기간을 줄창 무엇을 하면서 보내는 것은 그 자체로 또다른 노동일 뿐, 결코 휴식을 취했다고는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어느 새 11월입니다. 제가 사는 호주라는 나라의 한 해 업무가 얼추 마무리될 시점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각국에서 흘러들어온 이민자들로 사회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근간은 큰 변함없이 이달 말부터 슬슬 연말 휴가 분위기로 접어들 것입니다. 마치 긴 동면에 들어가는 생물들처럼 온 나라가 여름 휴가의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의 휴가 문화는 우리 눈에는 싱겁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바다든 산이든 줄창 한 곳에 텐트를 쳐놓고 그냥 먹고 자고 옷가지 빨아 널어가며 두어 주가량을 하냥 무심하게 보낸 후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황금같은 기간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 나라 사람들의 휴가문화를 이번 발리 여행을 계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년간을 호주에 살았으면서도 이제서야 겨우 이 나라 사람들의 쉬는 모습을 흉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합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4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신아연 (220.XXX.XXX.226)
이번 발리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진정한 휴식은 사실 일상 중에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한번에 한가지씩만 집중하면 심신이 지치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거든요. 그 다음 일을 머릿 속에 계획하고 염려하고 머리 쓰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요... 어쩌면 전생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걱정 근심이 심신을 좀 먹게 하는 거니까요..
답변달기
2009-11-02 18:59:12
0 0
신아연 (220.XXX.XXX.226)
표현이 참 재밌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고만고만한 애들이 있는 몇집끼리 놀러를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무슨 이민 보따리 챙기듯 짐을 꾸렸습니다. 솥단지 걸고 찌개 끓이고 부침개까지 해 먹으면서, 애들 챙기랴, 남편들 골프 수발들랴 (남편들은 사실 자기들끼리 골프가 하고 싶은데 미안하니까 인심쓰듯 식구들을 끌고가지요.^^) 정말 중노동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휴가라고 그래도 재미있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기운이 뻗쳤다 싶습니다.ㅎㅎ
답변달기
2009-11-02 18:55:11
0 0
인내천 (112.XXX.XXX.244)
제목을 보면서 대단한 일이 벌어졌을거라 잔뜩 기대하고 읽었는데 ~~ 실망(?)~ㅋㅋ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진정한 휴식을 발견(?)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쫒기듯 살아가는 울나라 사람들이 깊이 새겨야할 올바른 휴식문화 같습니다!
때이른 강추위가 고운 단풍을 쫒고있어 괜시리 바빠집니다~~
진정한 휴식은 언제쯤 가능할런지.......
답변달기
2009-11-02 11:34:03
0 0
marius (121.XXX.XXX.227)
우리나라의 '빨리빨리'가 '발리'가 되는 날을 꿈꾸게 하는 글입니다. 무슨 명절만 되면 차몰고 정신없이 고속도로 달리고 텔레비에서 고속도로정체현상 보도 하고 사는 것이 무슨 이런....
빨리빨리를 빨리 식혀서 발리가 되어야 우리 한국도 살만한 날라가 되자않겠습니까. 좋은 글 잘 읽고 푹 쉬는 마음으로 여길 떠납니다.
답변달기
2009-11-02 10:03:32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