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임철순 2009년 11월 03일 (화) 03:26:26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 밤,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는 올레밤길 걷기행사가 열렸습니다. 송파구청 광장을 출발해 석촌호수에서 성내천-장지천-탄천-한강-올림픽공원을 거쳐 구청광장으로 돌아오는, 총 31.63km를 걷는 행사입니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 밤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밤을 새워 걷는 이 행사는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연인과 가족 친구들은 걷는 동안 중간중간에서 열린 공연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몇 달 전에 큰 수술을 했던 내 친구도 9월에 이어 두 번째로 참가해 친구들과 함께 새벽 4시까지 걸었답니다. 몸과 건강의 고마움, 살아 있음의 행복함을 잘 알게 된 그에게 이 걷기행사는 아주 즐겁고 보람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행사가 시작될 때 너무 기관장들 위주로 진행돼 눈살 찌푸려지는 점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는 나에게도 한 번 참여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행사 자체보다 길 이름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송파 올레길은 최근 자연형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성내천 장지천을 비롯해 송파구의 4면을 둘러싼 4개 하천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조성돼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하여 ‘송파 워터웨이길’이라고도 한답니다. 전체 구간 중 교차로가 5개에 불과한 무장애 걷기 코스라는 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800km를 걷고 온 사람들이 늘어나고,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무슨 길, 무슨 길을 개발해 내고 있습니다. 송파 올레길도 산티아고를 다녀온 분의 제안으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송파 올레길은 가칭이라고 하는데, 올레는 원래 큰 길에서 집까지 이르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도 말이므로 제주도 외에는 올레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구에도 올레 1코스, 2코스 이렇게 두 개나 올레길이 있습니다.

지금 지자체들이 개발했거나 개발 예정인 길의 이름을 한 번 살펴봅시다. 오산 동부코스(오산), 두리마을 산책로(안성), 마곡사 솔바람길(공주), 안면송길(태안), 가야산 보원사지 가는 길(서산), 예당호길(예산), 신화가 있는 질마재길(고창), 변산 마실길(부안), 망해산 둘레길(군산), 백제의숨결 둘레길(익산), 위봉산성길(완주), 마루현길(장수), 무등산옛길(光州), 솔마루길(울산), 무학산 웰빙산책로(마산) 등 갖가지 길이 있습니다.

전남도의 남도갯길 6,300리길은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 하삼마을에서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까지 이어지는데, 이 사이에 영광 굴비길, 무안 낙짓길, 완도 장보고길, 보성 녹차길 꼬막길, 순천만길 등 무려 50개의 테마 코스가 2017년까지 조성됩니다. 부산도 만만치 않습니다. 해운대 문탠로드, 이기대 해안산책로, 동백섬 순환도로, 삼포 해안길, 절영 해안산책로, 암남공원 해안산책로, 두송반도 해안길, 천가동 해안산책로 등이 저마다 개성과 특징이 있는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많은 길 이름을 보며 세상엔 길도 참 많구나 하고 생각했고, '무엇이든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은 허구다. 무엇이든 똑같게 이루어지는 일은 가짜다.'라는 말도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민들의 건강과 역사 문화에 대한 애정에서 길을 만들어내고 찾아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고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길 이름은 원래 그 지역의 독특한 역사나 전설, 주민들의 삶과 직결돼 있습니다. 새로 길을 내고 이름을 붙일 때도 마땅히 그런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씨가 강원도와 함께 개발하고 있는 강원도 트레킹 코스 10개의 이름은 바우길입니다. 관계자들은 이 말이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건강의 여신 'Bau'와도 관련있다고 말하지만, 굳이 그걸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자바우'라는 강원도 사람들의 별칭에 맞는 길 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조성이 끝난 전북 부안의 변산 마실길은 원래 이름이 에움길이었다고 합니다. 굽은 길, 에워서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인데, 그 지방과 특별한 연관도 없는 일반 명사일 뿐입니다. 길 이름은 지어야겠고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군색해진 공무원들이 이런 작명을 했다가 '길 전문가'의 지적과 훈수를 받고 마실길로 바꿨다고 합니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정말 마실 한 번 가보고 싶어지는 이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 신정일씨(56)는 10대 시절부터 전국을 걸어다닌 '강호의 낭인'입니다. <영남대로>를 비롯한 저서가 40권을 넘는 이 문화사학자, 향토사학자는 요즘도 하루 평균 100리를 걷는다고 합니다. 그런 길 전문가가 보기에 지금의 걷기 붐이나 길 개발 경쟁에는 우스운 게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11월 11일을 '길의 날'로 제정하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고른 이유는 11이 두 발로 걷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미있는 노력이 부디 좋은 결실을 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턱대고 어디론가로 이동하는 신체운동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자연지리와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익히고 전하는 행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길을 낼 때는 제대로 올바른 이름을 붙이고, 그 길을 최대한 자연상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2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김종완 (211.XXX.XXX.129)
유익하게 잘 읽었어요. 모든 길을 한번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 이러면 이것도 '허구'이거나 '가짜'가 되나...
답변달기
2009-11-03 09:31:45
0 0
김영수 (118.XXX.XXX.158)
숨은 뜻은 보시지 않고 좋은 일이라고 고쳐 생각하신점 건강을 위해서도 잘 하셨습니다.
아침에 탄천길을 조금 걷다가 와서 이 글을 봅니다. 마음에 드는 길 이름이 많습니다.
특히 제 고향의 길 이름을 지은 사연도 알려주시어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09-11-03 08:57:3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