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日軍) 중좌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임종건 드라이펜

임종건

2009년 11월 12일 (목) 15:21:45

민족문제연구소가 8년여의 편찬 작업을 통해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9명의 인사의 명단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논란 중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을 빼려는 마지막 시도가 그의 아들 박지만 씨에 의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이었는데 법원에 의해 기각됐습니다.

저도 해방 후 처음 이루어진 이 작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때늦음에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작업이 늦어진 것은 일제의 잔재가 깊었다는 점과 친일의 내용이 매우 복잡다기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반민특위가 무산된 것도 그 때문이며, 일본군 장교를 지낸 박정희 정권에선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친일의 성격이 복잡다기한 원인과 관련, 식민지 기간 전반기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가운데 후반기 들어 친일로 변절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3인의 애국인사 중 많은 분들의 친일행적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뒤 주옥같은 글이나 노래를 지은 문화예술인, 그 중에서도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 또 존경해 마지않던 언론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의 위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의 친일행적을 접하며 글쓰기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이나 애국가는 나라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분들의 행적은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충분히 유명해진 뒤의 행적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진해서 부역한 경우, 일제의 회유 또는 협박에 못이긴 경우, 시대의 흐름에 무지했던 경우, 독립의 무망함에 자포자기한 경우 등등 나름대로 무수한 사정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분들은 자신들의 행적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는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고 역사의 재판에는 변호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우는 좀 다르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일본군이 아니라거나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토벌 대상이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 팔로군이었다는 박지만 씨의 게재금지가처분신청 이유를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만주군관학교도 일제가 설치, 운영한 학교이고, 토벌대상도 일본이 자의로 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민족문제연구소 측이 박정희의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 만주신문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1939년 경북 문경의 소학교 훈도(교사)였던 23세의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을 하면서 지원서에 일황에게 멸사봉공하겠다는 장문의 편지와 함께 혈서를 써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입학 연령제한 19세를 한참 넘긴 나이였습니다.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이 어떤 성격의 신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이 신문의 기록들은 일본 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이웃나라 대통령이 젊은 시절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임을 증거하는 그런 신문기사는 일본에게 사료적 가치가 더 컸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충성을 맹세한 덕분에 일본군 장교가 됐다면 그가 친일명단에 올랐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관학교 졸업 후 중좌(중위)까지 진급한 그를 친일자 명단에 올리려면 중위가 그만한 비중이 있는 계급인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일본군을 위해 쌓은 전공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박정희가 소학교 교사를 저버리고 군인이 되겠다고 나선 것은 보통은 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학교 교사는 당시로선 아무나 갈 수 없는 엘리트 직업이었을 테니까요. 더구나 나이 제한도 지난 몸으로 혈서에 충성 서약편지를 써가며 군인이 되려고 했던 그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훗날 군사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그이기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좋게 생각하면 일본군 장군으로 힘을 길러 나라를 독립시키리라, 나쁘게 생각하면 일본에 부역해서 최초의 조선인 총독이 되어보리라는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어떻든 그에게는 시골 교사로는 만족할 수 없는 꿈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일본군으로서의 꿈은 미완의 상태로 끝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안을 두고 충성 편지를 들어 친일의 결정적 근거인 양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고 봅니다. 일제시대 반일과 친일의 엇갈린 인생, 해방 후의 건국 공적을 균형되게 평가해달라는 것이 많은 친일인사 후손들의 요구였습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 대통령 공적을 이유로 친일명단에서 빼라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었기에 친일인사가 되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박정희는 그가 해방 이후의 최고 유명인사 중의 하나라는 이유로 끼워 넣기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부터 이미 너무나 많은 유명인사들의 친일행적에 자괴와 수치를 느꼈습니다.

한세상 (119.XXX.XXX.235)

일장기를 달고 뛴 손기정 옹은 친일일까 아닐까. 이라면 왜 일까, 아니라면 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