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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하고 싶을 때 -『대단한 책』
김이경 2009년 11월 17일 (화) 02:07:53
모처럼 만난 선배와 차를 마셨습니다. 제가 퍽 존경하고 따르던 선배라 처음엔 반갑고 좋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슬슬 피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꺼내든 “아, 나도 알아. 나도 그랬는데…” 하면서 조언을 해주니 나중엔 말을 꺼내기가 무서울 지경이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싱숭생숭해요.”
“마음이 허전해서 그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생각해봐, 어느 계절이든 다 좋지.”
“나이는 드는데 이룬 건 없고, 한심해요.”
“마음은 알겠는데 그건 성공 강박이야. 인생이 꼭 성취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다 안다며 해답을 내놓는 선배에게선, 흉허물 없이 속내를 터놓고 맞장구를 쳐주던 예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조언이 아니라 공감인데, 다른 건 다 아는 선배도 그것만은 모르는 듯했습니다.

길고 지루한 두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며, 뭐든지 다 아는 사람은 피곤해, 고개를 젓는데 문득 가슴 한쪽이 뜨끔했습니다. 걸핏하면 훈수 두고 아는 소리 잘하기로는 저도 누구 못지않다는 뒤늦은 깨달음 때문이었지요. 남의 눈의 티끌은 봐도 내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구나 싶어 집어든 책,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입니다.

『대단한 책』은 일본 최고의 러시아어 통ㆍ번역가이자 요미우리 문학상,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등을 수상한 작가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가 쓴 서평집입니다. 670쪽에 걸쳐 200여 권이 넘는 책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분야와 시대를 넘나드는 그 방대한 독서에는 기가 질릴 뿐입니다. “20년 동안 하루 평균 일곱 권(!)”을 읽었다니 말 다했지요. 더구나 그 전문적인 내용은 또 어떻고요! 아무튼 이 책을 읽고도 자부심에 손톱만큼의 흠집도 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정말 대단하신 겁니다.

하지만 단지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녀의 책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독가들이야 그녀 말고도 많으니까요. 그녀의 서평이 정말 ‘대단한’ 것은 다독(多讀)이나 박학다식을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넓고 깊은 지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그 지식이 오로지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서평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라크, 체첸,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등 분쟁지역에 관한 책들은 동시대 인간에 대한 그녀의 책임의식과 애정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흔히 이런 분쟁지역을 다루는 책이나 서평이 그 참상에 초점을 맞춰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과 달리, 요네하라는 과연 분쟁의 진실은 무엇이며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옳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3세계 난민을 동정하는 국외자의 시선이 아니라, 평화롭던 나라가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방조하는 자신의 책임까지 생각하는 내부자의 시선이지요.

특히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언론 보도의 진실성입니다. 광고대리점 출신의 보도관이 종군 취재의 틀을 마련하고 그 틀에 따라 ‘미디어와 군이 함께 행동’하며 전쟁을 실황 중계했던 이라크 전쟁부터, ‘테러리스트보다 저널리스트를 섬멸하라’고 공언하며 언론인 살해를 서슴지 않은 푸틴 대통령까지, 이 책에는 거짓 정보로 여론을 조작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일본인에 의해서 씌어지고 일본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더 무거워집니다. 문화강국이니 뭐니 말들 하지만 체첸에 대한 번역서 한 권을 찾기 힘든 우리 현실에서, 번역서는 물론이요 일본인 작가의 저술까지 갖고 있는 일본 출판의 비옥한 토양은 부러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과연 이러고도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한숨을 쉬며 책장을 넘기는데 이내 실실 웃음이 나옵니다. 제사(題詞)에서 “웃음을 주는 저자가 가장 좋다”고 밝혔듯이, 이 책에는 다양한 유머모음집부터 『방귀대전』이나 『팬티가 보인다』처럼 제목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책들까지 재미있는 책들이 다수 실려 있거든요. 그 중 방귀에 관한 우스개는 “뿡!” 하고 터질 만큼 우스웠지만 제 품위 유지를 위해서 대신 ‘웃음이 있는 설문조사’ 중 한 대목을 인용하지요.

“(2002년 가을 마이니치 신문에서 휴대전화로 한 설문조사는) 질문과 회답 방식이 권위나 체면이나 상식의 이면을 보여주고 그 진정한 속마음을 끌어내고 있다. ‘밤길에 신변의 위험을 느꼈을 때 찾아가는 곳은 파출소 29%, 편의점 70%,’ ‘연말에 백화점에서 파는 복주머니에 대한 느낌은 좋은 물건 싸게 잘 샀다 18%, 팔다 남은 것 떨이로 샀다 82%’.”

공감의 미소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러고 보면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짧은 서평들이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는 요네하라의 공감능력 때문인 듯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놀라운 능력이지요. 물론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부단히 독서를 통해 개발한 능력입니다. 버려진 개와 고양이들을 데려와 키우는 그녀는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엄청난 책을 읽는데, 그러고서 얻은 결론은 “개는 개로서 사랑하라” 입니다. 섣부른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워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책에 실린 원고 중 제일 마지막 것은 2006년 5월 18일에 쓴 것입니다. 이레 뒤인 25일, 2년여 간 앓아온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 대단한 투혼이지요. 그녀는 항암치료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내 몸으로 암 치료 책을 직접 검증하다’라는 주제의 서평을 연재했습니다. 성실한 독서가로, 냉철한 서평가로, 탁월한 통역가로 살아온 그녀답게 마지막 순간까지 읽고 평하고 전달하는 삶을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책 내용을 자신이 직접 몸으로 실천한 뒤 그 효능부터 비용까지 꼼꼼히 설명한 서평을 마무리하며 그녀는 탄식하듯 말합니다. “아, 내가 열 명만 더 있다면 이 모든 요법을 시험해 보는 건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에 인생은 짧고 깨달음은 늘 더디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니 어설픈 지식에 자족하기보다는 지식의 책임을 생각해야겠다고, 이 대단한 여자의 대단한 책을 보며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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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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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준 (218.XXX.XXX.152)
조언보다는 공감이 더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한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면서 좋은 글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문운이 창대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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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09:52:55
0 0
사티로 (212.XXX.XXX.155)
"지식의 책임' 이란 말이 치통처럼...
참 우연히 인터넷에서 '치아에 좋은 음식' 목록에 '우유'가 있는 것 봤습니다. 칼슘이 많으니 그런가 싶지만, 정작 우유를 먹은 직후 양치를 하기 전에는 우유가 치아에 악영향 주거든요.. 그러니 치아에 민감하신 분은 커피를 드실때도 밀크커피는 피하시는 게 좋다고 합니당.
선생님, 언제나처럼 무게 있는 글 오늘도 잘 짊어지고 나갑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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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1 02:19:54
0 0
양태석 (218.XXX.XXX.152)
좋은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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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16:55:06
0 1
김현재 (218.XXX.XXX.152)
무척이나 좋은 글을 매일 접하면서도 이제야 얄팍한 소감이나마 보내게 되네요. 김이경님의 글을 읽노라면 마치 동영상을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실감나고 우리네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읽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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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16:54:02
0 0
허노중 (218.XXX.XXX.152)
조언보다는 공감이 더욱 더 필요한 인간관계입니다. 이 시대 상황도 마찬가지지요. 김선생님의 간단한 표현이 내가슴을 꼭 찌릅니다. 감사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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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16:52:26
0 0
박진희 (218.XXX.XXX.135)
텍스트는 관두고 그림책만 보아도 도달 할 수 없는 분량이네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병에 관한 책까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평하다니,
누군가는 책을 만들기 위해, 읽기 위해 태어나고,
이런 분은 책을 평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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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14:01:45
0 0
차덕희 (121.XXX.XXX.96)
위험한 독서방법도 있지만 그쪽은 생략하고...30대 40대에 권하고싶은 책이 있습니다.논어를 현대인에 적용시켰어요. 논어의혼 이라는 책인데 정신건강에 친구가 되어주는 책이였어요.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좋아요.잘 읽혀져요.비슷한 경험이있습니다.번역이 잘된 책을 만나면 호흡도 느껴지지요.감사하게 읽습니다.번역가의 필력이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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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11:46:4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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