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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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데미안

김창식

2009년 11월 19일 (목) 07:38:48

"싱클레어, 꼬마! 아직 프란츠 크로머 생각하니?"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눈을 깜박이면서 웃어보였다.
"알겠니, 싱클레어! 내 말 잘 들어! 나는 가야만 한다. 너도 언젠가 다시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크로머나 그 밖의 다른 일로 해서. 그때는 네가 나를 불러도 지금까지처럼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그렇게 와줄 수는 없어. 그 때엔 너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데미안(Demian)'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 대화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참전한 싱클레어(Sinclair)가 농가 야전병원에서 부상한 데미안과 조우한 후 이별하는 장면이지요.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동료이자 스승, 화신이니 두 사람은 '카인의 표지'(Kains Abzeichen. 同類를 뜻함)를 가졌지요.

그들이 해후하는 시간적 배경이 소설에서는 이른 봄으로 나오지만, 왠지 그들의 만남과 애틋한 이별을 떠올리면 11월, 늦가을의 어느 날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마 헤세가 거의 전 작품을 통하여 추구한 테마가 '내면의 응시를 통한 자신에의 도달'이고, 침묵하는 늦가을이야말로 이러한 분위기에 걸맞은 정조의 계절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몽환적이고 우울하며 때로 찬연한 이미지가 가득 찬 소설의 주제는 헤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로의 길 위에 서 있는 인간(Der Mensch auf Dem Weg nach Sich Selbst, A Man on the Way to His True-self)'입니다. 데미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싱클레어가 자기실현을 위한 실마리에 다가간 것을 암시하며 데미안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화자로 한 성장소설(Bildungsroman)입니다. 데미안과의 만남-->소녀 베아트리체에 대한 연모-->음악가 파스토리우스와의 교우--> 아브락사스(Abraxas)에의 경도-->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Eva) 부인의 출현-->세계대전의 발발-->데미안과의 마지막 만남과 이별의 순서로 서사가 진행되지요. 각 대목의 이야기가 상징적으로 전개되며 전편에 사색, 관조, 응시, 방황, 구도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대사나 내레이션이 선문답을 주고받듯 신비하며 철학적 수필을 읽는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함축적인 에피소드는 거대한 새가 꿈속에서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라는 정체불명의 신(神)에게로 날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여성성과 남성성, 윤리적인 경건함과 탐미적인 관능,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도적인 것 등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과제를 결합하고 수행하는 신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혼(魂), 어두운 심연과 밝고 빛나는 양지를 동시에 상징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지성과 관능,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함께 지닌 에바 부인은 양극성(兩極性)을 통합한 존재의 상징, 다름 아닌 아브락사스의 현신(現身)으로 읽힙니다.

또 다른 교훈적인 이야기는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에게 들려 준, 별을 따려 한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별을 따려다 마지막 순간에 회의, 실족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별을 딸 수 있으리라 믿었더라면 별을 딸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얼핏 여겨지지만, 에바 부인은 혹 '순수(純粹)'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무엇을 바라고 구할 때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깨끗한 그 무엇이 아니라 섞임이 없고 전심전력을 다해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순수'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데 헤세가 데미안에서, 그리고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을 통하여 도달하려 하였던 '참다운 나'의 경지는 어떠한 것이며, 그것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딱 부러진 헤세의 대답은 없습니다. 단지 '노상(路上)의 인간'이 걷는 주변의 풍경과 그의 마음에 스치는 심상(心像)만이 눈에 띕니다. 자신을 이끄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 것이지요.

'문학의 목적은 해답과 열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부단히 개진할 뿐'이라는 헤세의 입장에 대해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고 폄하하는 비평가도 많습니다. 그의 소설이 대전 후 독일과 유럽의 피폐해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위안을 주었음을 상기하면 아이러니합니다. 저도 지금은 여러 회의가 듭니다. '자아의 발견'이 가치의 몰락, 인간성의 상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등 외부세계와의 긴장을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에의 침잠은 수동적인 도피행위가 아닐까? 더불어 사는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과연 참 자아(眞我)란 무엇일까? 자신에 도달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그렇다 해도 헤세의 소설들, 그 중에서도 데미안은 젊은 시절 저에게 폭풍과 같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에의 도달'은 저를 사로잡은 큰 과제였지요.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며, 전 아직 자신을 향한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데미안은 저에게도 친구이자 스승, 분신(Doffelgaenger)이었고, 저는 그의 가게무샤(影武者)였습니다.

*이건숙(한국외대 졸)의 번역을 간추림.

김창식 (211.XXX.XXX.73)

데미안은 광대무변한 무의식의 영역을 다룬 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왜 하필 희랍신화 악마의 한 사람인 '데미안'을 주인공으로 하고,
'카인의 표식'이 동료를 상징하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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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07: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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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39)

어린시절 언니의 영향으로 읽기시작 했던 데미안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미뤄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 대학시절엔 헤르만헤쎄의 *유리알 유희*에 빠진 적 있습니다. 깊은 사유의 투명한 세계를 알 것 같은 재미로....
일년 중 11월이 가장 자기자신에 침잠 할 수 있는 깊은 계절이라는데 공감합니다.
늦었지만 이른(?) 올 11월을 데미안 독서로 깊어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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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2 18: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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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80)

다비님의 재기를 아끼며,나그네알바....님의 중후하심을 배우고 안녕을 고함니다.바빠서가 아니고 제일에 충실하려고요.건강들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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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19: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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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데미안 하면 어찌 그 마지막 구절을 생각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그 부분이 데미안의 메세지를 함축한 것이니...

외로울 때,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생각하게 하는 책이 데미안이고 싱클레어의 방황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한 평생이
방황과 존재와의 싸움인 것을
매일 나를 직시하며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부단하게
정직하게 보도록, 힘이 들어도
그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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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0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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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80)

여고시절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춥고 막막했습니다.헷쎄전집을 갖은 이웃친구가 있어서 빌려다 보았지요.삶을 관조하는 따뜻함에 매료되었고 책을 살수있는 형편이되면 부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부자의 기준을...사십년이 흘렀어도 같네요.지극히 동양적인 정서,루이저 린제의 책과 함께 삶을 밝게해준 ...촛불과 같은 책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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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17: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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