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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그녀의 점심식사
임철순 2009년 11월 23일 (월) 01:07:45
그녀는 언제나 바쁩니다. 사람이 하도 많아 어깨가 서로 부딪히고 발길이 막히는 서울 한복판 대로변의 비좁은 키오스크에 1m 60cm도 안돼 보이는 몸을 우겨 넣은 채 하루 종일 순대를 자르고 떡볶이를 볶고, 오징어를 비롯한 각종 튀김과 김밥 어묵 군만두 담배를 팔고 있습니다.

가난과 고생은 피할 수 없는 팔자, 이것들이 떠나면 나는 살 수 없다고 말하려는 듯 얼굴에 칭칭 동여매 옹맺혀 놓은 듯한 모습.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는 그녀는 담배 피우며 해찰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는 일도 없고 자리를 비우는 일도 없습니다. 화장실도 안 가나 궁금할 정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박이로 서 있습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 초입의 추어탕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간 날, 그녀를 보았습니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난 오후 2시쯤, 좀 한산해진 음식점의 방에 그녀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먼발치서 슬쩍 보니 그녀가 주문한 것은 7,000원짜리 추어탕 한 그릇. 그녀가 파는 1,500원짜리 김밥 5개 가까운 가격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거의 7만원짜리 밥상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왕비의 수라상처럼 보였습니다.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맛있는 것을 아끼며 야금야금 즐기듯이 그녀는 추어탕에 밥을 말아 후후 불며 음미하며 아주 아주 느리게 먹었고, 당당하고 위엄 있게 이것저것 반찬을 더 달라고 몇 번씩 주문했습니다. 특히 밥을 덜어 넣을 때는 소중한 보물 다루듯 그 때마다 식기 뚜껑을 열고 닫았습니다. 눈빛과 얼굴이 평소와는 전혀 달라 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한 끼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저토록 자랑스럽고 엄숙한 일인가, 아무 생각없이 점심에도 소주를 곁들여 대충 빨리, 많이만 마시고 먹어대는 나로서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낯설어 보였습니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 혼자 여기에 왔을까. 그녀를 보면서 저절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첫째는 호스트 바. 이 경우와 별로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늘 남자 손님들에게 시달리느라 심신이 지치고 스트레스가 쌓인 호스티스들이 거꾸로 남자들을 사서 대접 받는 곳이 생각났습니다. 남자들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갚듯이 마음대로 호스트들을 부리거나 희롱하는 여성들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적절한 연상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그녀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종업원들에게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주문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서정주의 글 한 대목. 시였는지 산문이었는지 서정주시전집과 미당자서전을 뒤져도 원문을 끝내 찾지 못했지만, 이 두 가지 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예 서정주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여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댁인지, 소실댁인지 하여간 어떤 여자가 대낮에 남들 다 보는 마루 위에서 태평스레 낮잠을 자는데 그 모습이 호호탕탕,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 평소의 그녀와 같지 않았다는(이렇게 재미없는 표현이 아니었지만)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점심식사도 그만큼은 당당하고 거룩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말테 할아버지의 죽음. 수종병(水腫病)에 걸린 시종직 크리스토프 데트레프 브리게의 죽음은 두 달 동안이나 울스골 마을을 지배하고 명령했습니다. 평소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성으로 그 죽음은 아무나 붙들고 한탄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일생 동안 자기 안에 지니고 내려왔고, 스스로 길러낸 악독하고도 지배적인 죽음이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행사할 수 없었던 오만과 욕심과 지배욕 같은 모든 것이 그 죽음으로 옮아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괴로워한 끝에 죽었다는데, 평생 남을 섬기며 하인처럼 살아온 사람이 마지막에는 모든 이들을 하인처럼 부리면서 횡포ㆍ행패를 부린 셈입니다.

그 조그만 여인의 빛나는 점심잔치는 모처럼 혼자서 누려 보는 호사였고, 한껏 자신을 위해 돈을 써보는 사치행위임이 분명했습니다. 그 다음 날 다시 제 자리에서 일을 하는 그녀는 언제 그런 점심사치를 한 일이 있었냐는 듯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평소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짜증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친절하지도 않은 표정과 자세로 손님들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발적 선의에서든 강제적 장치에 의해서든, 아니면 영리와 사업을 위해서든 섬김을 받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달리 바꿔 말하면 갑인 사람과 을인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을인 사람도 또 다른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쾌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을 갑으로만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 항상 우주가 자기 위주로 돌아야 하고 무슨 모임이든 자신이 중심이 돼야만 만족하고 안심하는 사람들, 갑이 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을 섬길 줄 모르고 대접만 받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입니다. 세상과 삶을 절반밖에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달리, 내내 갑으로 살다가 을 생활을 경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고,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이제사 세상을 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최근에 몇 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혼자 추어탕을 먹던 그 여인과 그 여인의 마음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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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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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打 (121.XXX.XXX.193)
그녀처럼 식사하면 당뇨나 고지혈증같은 성인병은 전혀 걱정할 일이 없겠네유.

임주필님도 숭내 좀 내보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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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6 08: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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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 (211.XXX.XXX.129)
형, 잘 읽었습니다. 신문에도 이런 따뜻한 글이 나왔으면...
그 여인은 어디서 장사하는 분인가요?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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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7: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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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211.XXX.XXX.129)
그녀의 점심 식사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갑으로만 사는 사람은 인생의 절반 밖에는 모른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만 하늘은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자기만 일고 남에게 베풀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애의 탈을 벗지 못한 유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을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한 말을 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했듯이 끝까지 어린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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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3: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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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도 (211.XXX.XXX.129)
SBS 박상도 아나운서입니다. 선배님의 주옥 같은 글들을 보며 많이 느끼며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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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3: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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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저는 외국에 가 계신 줄 알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불러 주시면 으스대면서 아주 행복하고 맛나게 먹어 보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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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3: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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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118.XXX.XXX.158)
월요일 아침 잔잔한 이야기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돌아온 이 겨울에 그 여인의 가게를 찾아 순대와 따끈한 어묵을 먹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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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1: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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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재 (211.XXX.XXX.129)
안녕하셔요. 평소 쓰시는 좋은 글 감명 깊게 느끼며 잘 보고 있어 감사한 마음 큽니다.
다만 오늘 쓰신 김밥 아주머니에 대하여서는 조금 다른 시각이 있겠읍니다. 님께서 너무 직업의 귀천이나 직종의 등급 같은 편가르기식 구분법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무례한(?) 생각이 들었읍니다. 보신 대로 변 이라면 남대문 시장 통 큰 길가이겠는데 그 큰 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김밥집 매상이 얼마나 될른지 함 따져보시면 아마 철순 님의 수입을 훠얼씬 넘어설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리고 그 김밥 아누머니는 어쩌면 얼마 전 김밥을 팔아 몇 억인가 하는 재산을 기부하신 할머니의 제 이탄 정도를 준비하시는 아주머니일 수도 있을 듯 한데요,,,,,, 무모한 대듦 혜량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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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09: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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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감동스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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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09: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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