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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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얻는 것

황경춘

2009년 11월 25일 (수) 08:06:18

10 년쯤 전에 아내가 암으로 위 전체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주치의가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대자연을 즐기는 여행을 자주 하라고 권했습니다. 여생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세상 구경이나 하라는 뜻인 줄 생각하며 퇴원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직장에 있을 때 흔히 쓰게 되는 신상조사서에 취미는 독서라고 늘 썼는데 어느 때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는 글을 읽고 그 뒤로는 계속 여행이라고 썼습니다.

두 사람은 아내의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지런히 국내 명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빡빡한 일정에 쫓기는 단체 여행이 아니고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자동차를 몰며 유유히 돌아다니는, 어떻게 보면 팔자 좋은 노부부의 유람같이 보이는 한가로운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러 사람의 암 투병기를 읽고 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는 항암제도 중요하지만 암을 이겨내겠다는 기력과 긍정적(positive) 생활태도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주치의가 권한 여행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한 이야기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2~3년 후부터는 해외여행에도 도전하여 가까운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 미국, 유럽 등 먼 나라의 방문도 기회 있을 때마다 서슴지 않았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내의 건강도 점점 좋아져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행의 진수는 좀 힘들기는 하지만 매일의 일정부터 시작하여 모든 준비를 본인이 직접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각종 여행안내 소책자와 교통기관 시간표 같은 것을 참고하여 자기 취향과 체력에 알맞은 전체 일정표를 작성하고 이것을 토대로 매일의 일과를 소화하는 재미는 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성취감입니다.

소속된 클럽의 세계대회 같은 행사에 참가할 때에도 회의 전후에 일정을 짜서 부근 명승지를 관광하거나 지인(知人)을 방문하는 기회를 즐겨 만들었습니다. 항공권을 분실하여 공항에서 낭패를 당한 경험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훨씬 전에 컴퓨터로 전자 항공권(e-ticket)을 다운 받아 반신반의하며 사용을 한 스릴도 맛보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약 10년 동안 간선 철도(新幹線)의 발착 시간표가 거의 변동이 없어 옛날에 입수한 안내 책자를 토대로 일정을 짜도 큰 불편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어 퍽 재미있습니다.

거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일본의 웬만한 관광지는 거의 방문했으나 유독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沖繩)는 찾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클럽 본부에서 2009년도 세계대회를 오키나와에서 개최한다는 발표가 있어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계속 만연하는 신종플루 때문에 이마저 취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으레 대회 후에 실시되는 홈스테이 행사로 방문이 약속되었던 시고쿠(四國)의 마쓰야마(松山) 클럽에서 대회 취소에 관계없이 서울클럽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친절한 권유가 있어 어차피 준비 중이던 여행이라 응낙하였습니다.

마쓰야마 클럽과는 90년대 초부터 서로 왕래가 있었던 가까운 사이이고, 특히 클럽 전 회장이며 저하고는 절친한 친구가 올 봄에 회의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불행을 당했는데 다행히 언어와 보행 기능이 거의 회복되었다는 소식에 개인적으로도 방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열 명의 클럽회원이 다섯 가정에 분산되어 3박4일의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 여행의 주목적이나 그 행사 전후에 오사카(大阪)지방과 2차대전 때 미국의 원자탄 공격으로 쑥밭이 된 것으로 유명한 히로시마(廣島)도 겸해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일행 중에 고전무용 동호인이 세 분이나 있어 마쓰야마 클럽의 환영 모임에서 우리 전통 춤을 선보일 기회가 생겨 우리는 이에 필요한 의상과 음악 CD를 가지고, 오사카를 거쳐 기차로 바다 위에 건설된 철교를 건너 시고쿠로 들어갔습니다.

일본 곳곳에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이곳 클럽의 홈스테이 호스트 한 분은 치과의원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연세대학 어학원에서 1 년 동안 우리말 연수를 받은 지한파로, 회의의 공식 통역도 맡아 할 정도로 우리말에 능숙했습니다. 홈스테이 손님으로는 굳이 영어나 일본말에 미숙한 분을 받겠다고 미리 통고해 와서, 마침 일행 중에 단신으로 참가한 두 분이 이에 해당되어 배치했더니 이 분들과 밤늦은 시간까지 환담을 나누며 재미있게 지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히로시마에서, 우리는 한때 그들의 원폭 기념 ‘평화공원’에서 밀려 나와 공원 밖 부지에 건립되는 푸대접을 받던 우리 교포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가 이제는 당당히 공원 중심부에 이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했습니다.

누군가의 대형 꽃다발도 있었고 이 앞에서 일본 학생들이 학교숙제인 듯 열심히 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한때 일본 직업야구계의 스타였던 장훈 선수가 이곳 출신으로 중학 시절에 조선인이라고 피눈물 나는 인종차별을 받았던 일을 생각하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일본에 “귀여운 자식엔 여행을 시켜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에서, 특히 해외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여행은 비단 회복기의 암환자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객지에서의 창피는 그곳에 버리면 그만”이라는 얌체같은 일본속담은 배우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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