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을 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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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을 심는 사람

김수종

2009년 12월 30일 (수) 01:04:02


	동백꽃과 초가집

엄동설한이 깊어갑니다. 그러나 남쪽지방에선 눈보라 속에 핀 빨간 동백꽃이 더욱 쌩쌩하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선배 한 사람이 제주도에서 동백나무를 20년째 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백나무를 계속 심으며 키우다보니 황무지나 다름없던 돌밭 5만 평이 한겨울에도 검푸른 상록수 숲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이 동백 숲에 ‘카멜리아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원으로 가꾸는 동백 숲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사위를 둘러보면 하얗게 눈 덮인 한라산 정상이 잡힐 듯이 보이고, 멀리 반짝반짝 빛나는 태평양 물결 위에 마라도가 고래등처럼 떠 있습니다.


	연보라 빛의 탐스런 동백꽃

한파가 몰려오기 시작하던 지난 12월 중순 이곳을 찾아갔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상록수 잎사귀들 사이로 빨간색과 하얀색의 동백꽃이 만개했습니다. 윙윙거리는 꿀벌 소리가 가라앉듯이 귓가를 울리는가 하면, 짹짹거리는 여러 종류의 새소리로 이 동백 숲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동짓달에 동백꽃과 새를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벌떼가 그렇게 많이 몰려다니는 것은 좀 의외였습니다. 갑자기 동화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찬 서리가 내리고 설한풍이 불어야 꽃을 피우는 동백을 보노라면 자연이 오묘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양하다고 해야 할까요. 백화가 만발하는 봄, 여름, 가을을 다 제쳐두고 하필 찬바람이 불어야 꽃 봉우리를 피우는 동백의 자태는 정말 ‘쿨’합니다. 그래서 동백은 남쪽지방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북쪽지방 사람들에게는 동경(憧憬)을 불러일으키는 꽃인가 봅니다.

선배는 동백꽃 봉오리를 말려 만든 차를 한 잔 건네며 한참 동백예찬(冬柏禮讚)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백에 미쳐있었습니다. 나도 동백꽃을 좋아하지만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정서를 흡족히 적셔줄 식물학 및 문화적 지식은 없어서 고개만 끄덕거려야 했습니다.

옛 생각이 났습니다. 그 선배와 동향인 나도 동백꽃을 흔하게 보며 자랐습니다. 겨울이 되면 동네길이나 절벽과 냇가에 지천으로 피는 게 동백꽃과 수선화였습니다. 그 때는 동백나무가 땔감으로 사용되던 적이었으니까요. 나는 수선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푸른 잎사귀 사이에 빨갛게 핀 동백꽃은 참 좋아했습니다.

사실 그 때 동백꽃을 좋아한 것은 로맨틱한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동백꽃을 따내어 입에 물고 그 꿀샘에서 나오는 단물을 빨아 먹는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단물을 빨아먹고 버린 동백꽃이 길바닥에 어지러이 널리곤 했습니다.


	카메리아힐에는 각양각색 동백 수천 그루가 자란다

또한 동백꽃이 피면 동박새를 잡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새장은 2중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래 칸에는 미리 잡아 기르는 동박새를 가둬놓고 위 칸에는 문을 열어놓은 채 동백꽃 몇 송이를 집어넣고 동백나무 가지에 걸어 놓습니다. 동백꽃을 찾아온 새가 친구를 보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 앉는 순간 쥐덫처럼 새장 문이 닫힙니다. 유달리 색깔이 고운 동박새를 잡았을 때의 흥분은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옛날 시골의 결혼식은 농한기인 겨울에 신랑신부 집에서 치러지는데, 동백나무 가지로 아치를 만들고 거기에 신랑신부 이름을 써 놓곤 했습니다. 동백나무가 다산(多産)의 상징이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게 된 정보입니다.

198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는데 인근 파사데나에 ‘데스칸소가든’이라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번 갔다가 그곳이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동백 숲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릴 때 동백의 추억이 있어서인지 여가가 생길 때면 그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때는 따뜻한 캘리포니아가 굉장한 동백의 자생지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동백나무는 꽃을 피우고, 팽나무는 단풍들고

동백은 지중해와 유럽에서도 자라고,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백의 본고장은 동아시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남해안도 중요한 자생지의 하나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제주도나 남해안에 자생하는 동백의 국제적 이름(학명)이 모두 ‘카멜리아 쟈포니카’라는 사실입니다. 남쪽 지방의 바위틈에서 수천 년 수만 년을 자생해온 동백에 일본 이름이 붙었다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일본이 산업분야에서만 아니라 학술분야에서 앞섰던 데 기인한 결과입니다.

일본은 일찍부터 동백을 연구하고 가꾼 나라입니다. 그들은 동백을 ‘츠바키’(椿)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무사도 문화와 동백이 진하게 얽혀있고 동백과 관련된 작품 캐럭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츠바키 히메’’(椿姬)라고 번역했고 우리나라에선 그 한자음을 따서 ‘춘희’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이 오페라의 원작이 알렉산더 듀마의 소설 ‘La Dame aux camélias’이니 ‘동백 부인’ 또는 ‘동백 아가씨’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번역일 수 있습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동백꽃잎처럼 떨어진 후에도 그대로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꽃은 없습니다. 사람도 인생을 정리하면서 동백꽃처럼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겨울 꽃이어서 그런지 동백꽃은 진짜 생생한 모습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무사의 칼날에 떨어진 사람의 목에 비유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중국에선 동백을 ‘차화’(茶花) 또는 산다화(山茶花)라고 합니다. 사실 동백은 차나무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그런데 ‘장자’(莊子)의 첫 장 ‘소요유’(逍遙遊)에 ‘椿’자가 등장해서 동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동백 애호가들 사이에 인용되기도 합니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고시대에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년을 가을로 삼았다”
(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爲春八千歲爲秋)
시간과 공간적으로 스케일이 컸던 장자의 세계관을 느끼게 하는 구절인데, 여기 나오는 ‘椿’이 우리가 생각하는 동백나무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동백이라기보다는 상상의 영목(靈木)이 아니냐는 게 일반적 해석인 듯합니다.


	동백 숲의 오솔길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동백의 종류는 250종 이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멜리아힐에도 웬만한 동백 종은 다 있다고 합니다. 9월부터 5월까지 참으로 다양한 동백꽃이 핍니다. “이게 동백이야”하고 의문을 던질 정도로 희한한 품종도 있습니다. 장미꽃만 화려하고 종류도 많은 줄 알았더니 동백도 그에 못하지 않다고 합니다.

선배는 동백나무를 구하기 위해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다고 합니다. 동백의 본산인 일본 중국 동남아를 가장 많이 다녔고 지중해를 포함해서 유럽 전역과 중남미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스스로 말하듯이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배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나는 웃음과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건장했고 완력도 돋보였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하고 힘이 좋았던지 그가 밭일을 할 때면 흙먼지만 보인다고 어른들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 그는 떨어진 동백꽃 송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문학청년 같이 김유정의 ‘동백꽃’과 듀마의 ‘동백 아가씨’를 이야기하며 동백예찬을 풀어나갑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나날을 동백을 생각하며, 동백을 찾아 세계를 누비고, 또 동백나무를 쓰다듬으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카멜리아힐의 양언보 대표

카멜리아힐은 정연한 모습의 서양식 정원이 아닙니다. 길도 구불구불하고 제주도 돌담으로 울타리도 둘렀습니다. 더구나 카멜리아힐 안에는 제주도의 전통적인 무덤 여러 기(基)가 동백나무에 둘러싸여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묘한 동백나무 정원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나무를 심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심고 열매를 수확하려면 4~5년은 걸리고, 정원 모습을 보려면 10~20년 이상 가꾸어야 하고, 목재를 얻으려면 30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카멜리아힐의 양언보 대표는 1980년대 초반에 나무를 심으면서 2010년을 바라보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소설 중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소설끝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막과 같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탈바꿈시키는데 단지 한 사람의 몸과 마음만으로 충분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경탄할만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장 지오노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경탄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 잠재력을 백분 발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뿐입니다.

양태석 (61.XXX.XXX.30)

좋은 작품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새해에는 더욱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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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0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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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뎍희 (121.XXX.XXX.20)

처음 동백울타리에서 뚝뚝 떨어진 꽃망울이 눈에 들어왔을때 경이로왔습니다.낙화가 더 아름다울수도 있구나하고.이미자씨의 시대는 보릿고개의 시절이여서 연약한꽃으로 상상했지요.똘망똘망하고 아름다운 자태에서 삶의 용기를 주는 이미지의 꽃임니다.잎사귀와의 어울림도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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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14: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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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co (211.XXX.XXX.129)

참 좋군요. 양언보라는 이름은 담양 소쇄원을 만든 梁山甫라는 분을 절로 연상케 하는군요. 아마 그 후손이 아닌가 싶고, 그 혈통이 이런 걸 만들게 하지 않았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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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0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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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220.XXX.XXX.63)

아!~제주도에 그런 명소가 있었나요?
카메리아힐에 꼭 함 가보고 싶네요~~
숲은 즐기면서도 한 그루 나무 심기에 인색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양언보 대표님 대단하십니다!!
좋은 칼럼 써주신 김 선생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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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07: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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