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기곡경, 강구연월에다 일로영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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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기곡경, 강구연월에다 일로영일까지

고영회

2010년 01월 05일 (화) 02:19:45

교수신문은 2009년을 설명하는 말로 방기곡경(旁岐曲逕)을, 올해 2010년 희망을 담은 말은 강구연월(康衢煙月)로 정했다고 합니다. 또 어느 취업전문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가 설문조사를 했더니 직장인들은 구지부득(求之不得)과 구복지루(口腹之累)를 뽑았다고 하고요.

청와대는 2010년 화두를 일로영일(一勞永逸)로 하기로 했다는데, 이는 “지금의 노고를 통해 그 뒤 오랫동안 안락을 누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저와 정부는 일로영일의 자세로 선진 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확실히 다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방기곡경, 강구연월, 구지부득, 구복지루, 일로영일과 같은 한자로 된 사자성어가 지난 연말과 새해 처음을 장식한 낱말들입니다. 분명히 우리 국민을 위해 고민해서 찾아낸 말들인데 독자 여러분은 이런 말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있는지요? 저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요.

어느 시대를 상징으로 나타내는 말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국민도 나라 안팎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함축하여 나타낼 말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말을 왜 저렇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과 같은 중국 책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세종대왕, 중국 사상을 연구하긴 했지만 율곡과 퇴계, 다산 정약용 선생, 근세에 와서도 안창호 김구 같은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화, 소설, 민간 설화에서 찾아 봐도 될 것이고. 해방된 뒤 나온 여러 소설 속에서 찾아도 될 것도 같건만 멀리 중국책에서, 읽어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잘도 찾아냅니다.

교수들이야 학자니까 고상하게 여기는 중국 책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기업체야 상술 가운데 하나로 그랬던 것이라 받아들이면 되지만, 이젠 청와대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말을 찾아내 온 국민더러 이런 말도 모르냐고 닦달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 “우수천석(雨垂穿石)이라고 끊임없이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돌도 뚫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식으로 글을 씁니다. 앞에 있는 ‘우수천석’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뜻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런 군더더기를 붙여 놨을까를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이 모르는 한자 성어 좀 안다고 허세를 부리는 얄팍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요.

축사나 결혼 주례사를 들으면 엇비슷한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말하자면 ‘학이시습지학난성 ... 일촌광음불가경’이라 했다. 이 말은 어디에 나오는 말인데 뜻은 이러이러하다. 이런 말을 교훈 삼아 어떻게 하거라 하는 식입니다. 위 문장이야 한문교과서에 나온 것이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중국 고전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를 글을 따올 때는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찾아 오신 분이 뜻을 설명할 때 그런가 보다 하면서 받아들일 뿐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까닭이 뭔지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사람들에게 중얼중얼하고 나서 그 다음에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이니 그 뜻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살아라는 말인가 봅니다. 어떤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할까요. 중국 고전 속에 나오는 이렇게 어려운 말을 알고 있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인가요? 그냥 뜻만 말해서는 자기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생각을 자기 소리로 당당하게 전하지 못하는 열등감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례사나 축사를 하기에 모자라는 사람에게 부탁한 셈이니 사람을 잘못 찾았다는 생각입니다.

교수나 기업체가 이상한 말을 찾아내서 그들을 알려 보려는 속셈에서 그랬다 하더라도 청와대에서 ‘일로영일’이란 말을 들고 나온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온 국민에게 ‘일로영일’이라 외치면 알아들을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모릅니다. 신문에서 풀이해 준 글을 보고 그런 뜻인가 보다 했을 뿐입니다. 결국 청와대는 자기 뜻을 알린다고 하면서 국민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외쳤습니다.

‘일로영일’은 사회 각 분야 400여명이 추천한 말 가운데에서 골랐다고 합니다. 그 400여분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분들인데 그 분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추천한 분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분들 모두 저 멀리 있는 중국 책을 뒤져 어렵디 어려운 말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긴 싫습니다. 설령 ‘일로영일’이 가진 뜻이 좋더라도 국민이 알아듣기 어려우므로 이 말 말고 ‘봄에 씨앗을 뿌리는 농사꾼의 마음으로’라고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소통이 됩니다. 국민과 소통하겠다고 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소통하길 기대합니다. 쉬운 우리말로 하면 우리 국민은 알아듣습니다.

황성희 (121.XXX.XXX.202)

고영회 회장님의 글 잘읽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글 보내 주셔 감사합니다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사대주의적 의식, 또는 지적 허세를 잘 지적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글로벌화를 주장하며 은행, 증권사, 제2금융권을 통합하고 온갓 파생상품에 투자하여 위험을 높이는 것이 마치 금융산업의 선진화인처럼 떠들고 있지요. 소위 한국의 소위 금융전문가들, 정책입안자들은
그러나 그들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미국에서 지금 오바마 대통령은 오히려 "살찐 고양이"들의 무절제와 탐욕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나라가 회복할 수 없는 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상업은행의 파생상품 투자를 제한하는 강력한 규제 방침을 밝히고 있지요.
백성의 안위와 삶의 질 향상을 꾀하지 않은 정책과 수사는 다 그들만의 잔치요, 심지어 사기지요. 진실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들이 그리운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