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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겨울여행
김덕기 2010년 01월 07일 (목) 00:54:25
지난해 12월 어느 일요일 마을 주민들과 처음으로 임진각, 인천대교, 월미도를 돌아오는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노인회 주관 행사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연로한 총무가 마을 연례행사라며 동행을 간곡히 요청하는 것을 무작정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A4 용지에 복사한 초대장의 ‘작은 겨울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눈길을 끌었고 흔들리는 관광버스 안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해 여행에 따라나섰습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을 알리는 뽕짝이 울려 퍼지고 잠시 뒤 ‘후, 후-’ 소리에 이어 관광버스가 8시에 출발한다는 이장의 탁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동네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둠이 가신 마을상회 앞으로 한껏 멋을 낸 마을 분들이 종종걸음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대부분 점퍼 차림이었으나 남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자를 썼고 모피 코트를 입은 멋쟁이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예정시간보다 30여분 늦게 출발했지만 불평 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 블루스곡이 흐르는 가운데 김혜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십대의 여성 도우미가 등장,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팔도를 다녀 봐도 오빠 언니들처럼 잘 생긴 이들은 처음”이라며 분위기를 띄우는 그녀의 등장에 눈을 크게 뜨자 옆자리에 앉은 70대 초반의 어르신은 ‘뭘 그리 놀라나’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녀의 능란한 솜씨로 버스 안은 금세 고희연, 미수연과 같은 잔칫집 분위기가 됐습니다. 오빠, 언니, 엄마하며 권하는 마음의 잔에 주민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갔습니다.

임진각에서 잠시 숨을 고른 관광버스는 디스코 메들리에 신이 났는지 속도를 높였고 그녀의 입담도 진해 갔습니다. 일회용 물 컵을 높이 들며 “이 잔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비아그라”라는 소리에 술잔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산적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장은 “우리나라 이장 중 한산리 이장이 가장 미남”이라는 그녀의 입담에 뻘떡 일어나 “이 잔을 안 받으면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다”는 권주가를 부르며 맞장구 쳤습니다.

취기 오른 관광버스가 자유로로 올라서자 운전기사는 “자 뛰세요” 하며 볼륨을 높였습니다. 순간, 중간쯤에 앉아 있던 한 키 작은 아주머니가 용수철처럼 통로로 튀어나와 어깨를 흔들며 막춤의 향연을 알렸습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아주머니들로 통로는 금세 무도회장이 됐습니다. 자리에 앉은 이들까지 어깨를 들썩이게 한 무도회는 영종대교 휴게실에서 잠시 쉬었을 뿐 월미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관광버스의 흔들림에 대한 호기심도 많이 풀렸습니다.

푸짐한 회로 점심식사를 한 뒤 월미도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습니다. 출항 예정시간 30분 전 승선이 시작됐습니다. 4층으로 된 유람선 뱃머리에 오르자 귀를 찢는 듯한 디스코 음악이 첫 나들이에 나선 나를 어리둥절케 만들었습니다. 유람선 1층은 팔도 춤꾼들로 이미 바다에 뜬 거대한 무도회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유람선이 출발하면서 1층에서는 우크라이나 미희의 춤과 중국 젊은이의 기예공연이 펼쳐졌습니다. 2층은 대형 노래방, 3층은 라이브 카페였습니다. 어느 곳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40여분의 공연이 끝나자 1층은 다시 무도회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출연자들까지 가세했습니다. 광란의 무대가 돼버린 1층은 아저씨, 아주머니의 한풀이 마당이었습니다.

인천 어시장에서 장보기를 마치고 출발한 것은 5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습니다. 20여분이 지나면서 켜진 버스 안의 오색 조명이 어두워지는 바깥과 조화를 이루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버스 안에도 이런 장치가 있었나 하고 놀랄 틈도 없이 버스 통로는 여인들이 점령해 버렸습니다. 평소 막춤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이장 어머니와 모피 코트를 입고 온 칠순의 범석이네 할머니가 두 손을 휘저으며 점령군을 지휘했습니다. 열정적으로 뛰는 여인네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오색 조명아래 이슬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여인네들의 춤은 막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천신(薦新)굿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경건한 의식이었습니다. 기계적으로 몸을 흔드는 여인의 눈빛은 천신굿에 참여한 무녀의 눈빛이었습니다. 뒷자리로 밀려난 나의 혼도 어느새 통로의 여인들과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관광버스는 앞섶을 풀어헤친 도우미의 마지막 공연으로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녀는 농익은 사십대 여인의 뽀얀 속살을 살짝 보이며 남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술 취한 이장은 자지러지는 듯한 ‘오빠소리’에 만원짜리 지폐 두 장을 그녀의 양쪽 가슴에 찔러 넣었습니다. 백발의 어른이 돈을 흔들자 그녀는 머리를 숙여 가슴이 더 잘 보이도록 하고는 노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녀가 “오빠, 여기에 넣어 봐” 하며 내 손을 잡아당겼습니다. 머뭇거리며 만원짜리 한 장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자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살짝 윙크를 했습니다. 남정네 지갑 여는 그녀의 솜씨는 가무, 입담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뒷자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천신굿을 벌이던 여인네들의 춤판도 출발지였던 마을상회 앞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사내들의 얼굴엔 올 농사의 마지막 행사인 겨울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 대한 만족감이 가득했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동네 이곳저곳에서 들려왔습니다. 초겨울 밤하늘 별빛이 그믐의 어둠 속에 더욱 빛났습니다.

김덕기
경기도 동두천 출생. 한국경제신문, 스포츠서울에서 체육기자, 부장으로 근무하며 많은 국내외 스포츠행사를 취재했으며, 스포츠투데이 축구전문 대기자, 한국축구연구소 사무총장을 역임. 현재 고향 가까운 양주시 남면 한산리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영농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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