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김이경 책방
     
세상에 화가 난 사람에게 -『가만히 좋아하는』
김이경 2010년 01월 11일 (월) 02:50:01
기상관측 사상 최대의 폭설이 서울에 내린 날,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다가 그예 집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도서관이었지만 사실 천지를 뒤덮은 눈 세례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요. 차들이 뚝 끊긴 거리는 적막하고 조용했습니다. 한껏 몸을 낮추고 슬금슬금 걷는 사람들, 부지런히 가게 앞을 치우는 상인들, 세상이 참 평화롭게 보이더군요.

하지만 지하철역은 사정이 달라서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소란했습니다. 바닥은 눈 녹은 물로 흥건해서 방심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 역시 발밑에 온 신경을 쏟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며 저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순간 몸이 휘청하며 뒤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짧고 튼실한 다리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요.

저는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남자가 저를 째려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는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상투적인 수사(修辭)긴 해도 ‘희망찬 새해’가 시작된 첫 월요일인데, 그 사람은 무엇 때문인지 잔뜩 성이 나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습니다.

새하얀 눈길을 걸으며 저는 그의 노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가눌 수 없는 적의를 드러낼 만큼 그를 성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의 적의가 어디서 근원하는지 모를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불행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난 그의 마음이 그의 불행을 더 부추길 거란 사실이지요. 어쩌면 좋을까, 막막한 심정에 시가 들어옵니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코스모스」전문)

낯선 이에게 살기등등한 눈길을 보내던 남자도 처음부터 그렇게 날이 서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구도 핍박하지 않았는데 왜 나만 괴롭히느냐는 억울함이 쌓여서 그리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이도 나처럼 울며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겠지요. 아니, 아귀다툼을 하며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심정이겠지요. 아, 눈앞이 흐려집니다.

이 시를 쓴 김사인은 25년 동안 단 두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입니다. 요즘처럼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거의 게으름으로 여겨질 만큼 참으로 보기 드문 과묵함이지요. 하지만 19년 만에 나온 김사인의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으며 저는 그의 게으름이, 그 지독한 과묵함이 참 고마웠습니다. 모두들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 그래서 “다리 사이 호두 두 알이 영문도 모르고 시달리는” 세상에서, 느린 걸음으로 세상 그늘을 찬찬히 살피는 시인이 아니었다면 읽기만 해도 목이 메는 저런 위로가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말이고 감정이고 모든 걸 주절주절 늘어놓아야 성이 풀리는 세태 탓인지, 시(詩)도 생략과 암시의 묘(妙)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김사인의 시는 눈 내린 아침처럼 조용하고 텅 빈 여백으로 가득합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조용한 일」 전문)

밤은 어둡고, 겨울은 추우며, 눈이 쌓이면 걸음이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골목 한 귀퉁이를 밝히는 가로등이 반갑고 따끈한 아랫목이 그립고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손길이 고마운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불만이 자꾸 커져서, 왜 밤에 어둡냐고, 왜 겨울에 이리 춥냐고, 왜 눈을 쌓이게 두느냐고 탓하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물론 불만이 문명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문명이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들을 위협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만이 아니라 겸손일 듯합니다. 정처 잃은 마음을 낙엽에 의지해 그 낙엽 하나에도 고마워하는 마음, 그 마음이 소란한 이 세상을 조금은 살맛나게 하지 않을까요?

비 오는 늦가을, 한가한 풍경을 즐기던 시인은 문득 “그런데 귀뚜라미들은 대체 어디서 이 비를 긋겠나”고 자문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벌레까지 돌아보는 따스한 오지랖입니다. 덕분에 시집을 덮을 즈음엔, 흔들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요 작은 벌레에게도 삶은 참으로 무거움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시인은 시가 그 무거움을 덜어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그러하듯, 서정에 기대어 그 삶을 견디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시는 현실의 고통 앞에 무력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회의합니다. 김사인의 서정시가 빛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그는 시로도 어쩔 수 없는 게 생활의 엄중함이며 자신은 다만 그 슬픔에 가까워지려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은 오직 같이 슬퍼하는 것뿐이니까요.

홀로 세상의 변방으로 쫓겨난 듯 서럽고 억울한 당신에게, 그래서 세상 모두에게 삿대질을 하고픈 당신에게 시 한 편 드립니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노숙」전문)

어떤가요, 당신 곁의 다른 설움이 보이시나요? 설운 것들끼리 보듬고 살기에도 빠듯한 세상, 부디 우리 잘 살아봐요.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9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UTOPCO (123.XXX.XXX.192)
바라보는 나를 그냥 바닥에 내려 놓으세요
"행복"하게 만드는 가치를 구하고 지금 나를 버리세요
아이티의 고아들을 입양하는 마음을 배우면 됩니다.
1 개에 대해 99개 이상을 걱정 안하는 구원을 찾으세요


그런데
그 것이 참 어려워서 ......
그래도 거듭 거듭 노력해야 됩니다.
답변달기
2010-01-21 19:03:38
0 0
차덕희 (121.XXX.XXX.207)
이경씨의 글솜씨에 홀려서 쇄잔해 가는 몸을 객체로만 보았더니 살 맛이 않나네요.몸은 그렇게 청승덩이는 아닌데.마음,정신,영혼이 담긴 그릇으로 희,노,애,락,애,오,욕으로 변화하지요.소멸이라는 종착역에는 영원한 세계가 존재할 터이고...이경씨 글을 읽으면 퐁당 ㅃㅏ지네요.자연의 위력앞에 겸손해 지라는 뜻이 겠지요.
답변달기
2010-01-20 18:54:59
0 0
김지회 (58.XXX.XXX.64)
책을 소개하기위한 가상의 설정이기를 바랍니다 그러하지 않다면 너무 이 세상이 서글퍼지고 그 사람이 불쌍하지 않을까요 경제제일주의 일등제일주의가 인성을 잃어가고 삶의 참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니 너무 삭막하기만 하여지네요 꼴찌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 참세상이 아닌가 싶네요
답변달기
2010-01-17 09:54:24
0 0
김윤옥 (210.XXX.XXX.36)
따뜻한 위로

사는 동안 상처받고
다친 마음 쓸쓸하면
따뜻한 차 한잔에 마음을 기대 봐요

방울방울 몸과 맘 적실 때
감싸안는 안온함
다독다독 나직하게 속삭이는
따뜻한 위로되어

그대 안에 흐르게요
답변달기
2010-01-13 14:31:22
0 0
안법영 (211.XXX.XXX.41)
감사와 겸손
답변달기
2010-01-13 08:54:14
0 0
인내천 (220.XXX.XXX.60)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구비곷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곷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곷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푸르디 푸른 진주남강 촉석루에서 왜장 게다니 무라노스케를 안고 떨어져 함께 죽은 의기 논개를 기린 변영로 시인의 "논개"라는 시 입니다
첫 머리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를 음미해 봤음 좋겠습니다~~
세상에 화낼게 없어서 어깨스친 여인에게 화내시지 말고 삽질로 금수강산 거덜내는 MB정권에게,용산참사 외면하는 몰인정한 서울시장에게,세종시 뒤집는 모리배들에게 화를 내실 수는 없는지요?
째째한 분노 말고 거룩한 분노 말입니다!!
답변달기
2010-01-11 23:44:05
0 0
신아연 (203.XXX.XXX.182)
잘 살아보자구요...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답변달기
2010-01-11 15:31:05
0 0
고재윤 (211.XXX.XXX.41)
참으로 한국사회는 폐쇄적인 사회이고 조급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특히 매우 폐쇄적입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이라면 모든 것 다 내줄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조그만한 일에도 적의를 품는 경우도 참 많아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며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냥 넘기세요.
답변달기
2010-01-11 13:44:51
0 0
정진홍 (211.XXX.XXX.41)
늘 참 고맙습니다. 늘 그렇게 제 삶이 조용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10-01-11 13:42:5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