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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받을 때 -『심양장계』
김이경 2010년 01월 28일 (목) 07:32:54
열너덧 살 무렵, 법정의 『무소유』를 퍽 좋아했습니다. 그 책 덕분에 아끼던 손목시계를 잃어버리고도 본래 내 것이 아니라 새기며 자못 의연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책에서 저를 당혹스럽게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은 흔히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니 실제 그 말은 당신을 오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 자체는 금방 이해가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 이 문장을 이해한다는 내 생각도 오해일까, 글을 쓴 이는 이해가 안 될 걸 알면서 글은 왜 쓸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어린 제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해한다며, 은밀한 자부심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즈음 글을 쓰면서 그때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해를 바라고 쓰지만 오해는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독서는 나름의 오독(誤讀)이란 생각까지 듭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제 맘에 없는 것을 오해하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재단하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속상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똑같은 한국어로 말하는데 왜 이리 말귀가 안 통하나 답답할 때, 소현세자를 떠올립니다. 부왕(父王)의 오해로 인해 자신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까지 떼죽음을 당한 그 사람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습니다.

조선왕조 최고의 비극적 인물이라 해도 좋은 소현세자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똑같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도세자의 경우,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고 그 아들 정조가 아비의 복권을 꾀하며 이런저런 소회를 밝힌 것이 있지만, 소현세자는 자신도 아내도 아들들도 아무 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역적으로 몰려 처가는 풍비박산이 나고 세 아들 중 둘은 먼 제주 땅에서 어린 나이에 죽었으니 그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근년에 완역본이 나온 『심양장계』는 그런 점에서 주목을 끕니다. 침묵에 가려진 소현세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심양장계』는 인질로 끌려가던 날부터 8년간의 억류생활을 낱낱이 기록하여, 17세기 조선과 청의 생활상은 물론 한양과 심양 사이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확인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료이기도 합니다.

천 쪽이 넘는 『심양장계』는 소현세자를 수행한 세자시강원 관리들이 청국의 수도 심양에서 조선의 왕에게 보낸 장계(狀啓)1), 즉 보고서를 모은 책입니다. 때론 하루에도 3,4통씩 써 보낸 장계에는 세자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꼼꼼한지 입이 딱 벌어집니다. 그처럼 상세한 보고서를 거의 매일같이, 그것도 청국의 검열과 본국의 사정까지 헤아리며 썼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삼 그 노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수고롭다 한들 소현세자에 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심양장계』를 보면, 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조선정부를 대표한 외교사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 백성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대변자였고, 조청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을 해결하는 외교관이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청과의 관계는 그때부터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만큼, 심양의 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일은 파병 요청이었습니다. 요동 일대를 장악한 청은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는데, 여전히 숭명파(崇明派)가 세력을 떨치는 조선 조정이 이에 쉬 응할 리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괴로움을 겪는 것은 심양의 세자였습니다. 일례로, 하루에 세 차례나 올린 1638년 8월 6일자 장계는 청나라의 파병 요구 때문에 세자가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잘 보여줍니다.

“요사이 제가 길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황제께서 징병을 거스른 데 대해 화를 내어 군대 출행에 세자를 데리고 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첫 번째 장계)
일의 형편이 망극하여 할 수 없이 감사와 병사에게, 한편으로는 국왕께 아뢰고 한편으로는 급히 행군하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속히 잘 처리하도록 명하시길 바랍니다.(세 번째 장계)”

그런데 이틀 뒤인 8일자 장계에는 “한편으로는 장계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보냈으나 어떻게 할 것인지 아직 모르니 애가 타고 망극합니다.”라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쌍방소통의 편지와 달리 보고서란 것은 일방통행의 형식입니다. 그러기에 보고를 올릴 뿐인 심양의 세자 일행은 본국의 대답을 받지 못한 채 불안과 초조에 시달립니다. 물리적 거리는 이렇게 심리적 거리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이런 막막함 속에서도 소현세자는 그때그때 본국의 처사를 변호하고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심지어 명나라와 내통한 임경업을 비롯하여 김상헌 등 반청파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그들의 명분을 살려주고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신하를 거두는 것은 군주의 책무이며, 외교란 강온 양 극단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심양장계』의 상당 부분은 청나라의 요구를 전하고 그 처리과정을 보고하는 내용이지만, 그 못지않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청국 내부의 사정입니다. 청 황제의 병치레부터 후계구도를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까지, 장계는 최대한 자세히 청국의 사정을 전하고 그에 대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청국을 정탐하고 인맥을 쌓으면서 후일을 도모한 소현세자의 정략가적 면모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불안을 느낀 인조에게 아들 소현세자는 자랑이기보다 위협이었습니다. 세자가 심양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청나라는 물론 조선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1644년 소현세자가 잠시 귀국하자 “도성 안의 벼슬아치와 유생, 군민들이 모두 나와 마중하는데, 길거리를 메워 앞뒤가 완전히 닿았으며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미 소현세자를 아들이 아닌 경쟁자로 여기던 인조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더구나 예전부터 세자에게 호감을 갖고 친밀하게 지낸 예친왕 다이곤이 새로 즉위한 순치제의 섭정이 되자 인조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1645년 청은 소현세자에게 귀국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8년간의 긴 억류생활에서 풀려난 아들을 아버지는 반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쫓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올리기 위한 청의 계략이라 의심하여 세자를 철저히 정무에서 배제합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인 1645년 4월 23일, 갑자기 병석에 누운 소현세자는 사흘 뒤 세상을 뜨고 맙니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이었지만, 온몸이 검게 변하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세자의 시신을 보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죽음에 의혹을 제기한 세자빈과 그 친정식구들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어의를 심문하자는 사간원의 요청도 묵살했습니다. 그리고 멀쩡히 세손(세자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그를 폐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습니다. 정통성에 목숨을 거는 조선왕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해, 인조는 자신이 먹는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며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친정어머니와 남자형제들 넷을 모두 죽입니다. 또 겨우 열세 살, 아홉 살, 네 살 된 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 결국 그 중 둘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아들에 대한 질투와 의심이 부른 끔찍한 비극이었지요.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죽음으로 내몬 인조도 할 말은 있을 겁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요. 남들이 오해한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두려운 일이지요. 사람의 이해는 한계가 있고 오해는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사람인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 듯합니다. 내가 당신을 오해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그래서 언제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더 큰 오해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장계란 지방에 파견 간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뜻하며, ‘심양장계’의 수신인은 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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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22.XXX.XXX.6)
고맙습니다.
심양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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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8 00:50:18
0 0
간이역 (58.XXX.XXX.235)
글을 읽고 나니, 이곳 아프간에서 겪고있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이제는 좀 편안해 지는 느낌입니다. 많은 것을 느낌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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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3:18:22
0 0
happy (112.XXX.XXX.231)
2008년 8월초, 중국의 淸代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중국 학자의 논문 "三韓山斗(삼학사)碑 硏究"에대한 번역을 윤집 11대孫의 요청으로 번역해준바 있었는데,작가의 심양장계를 읽어보니 당시 심양으로 소현세자 등을 인질로하여 먼저 잡혀간 홍익한이 세자가 목숨만은 부디 지키라는 권유를 받들지않고 사형 순간까지도 淸 太宗(皇太極)에게 절대로 항복하지않은 그의절개 정신이 생각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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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9 10:47:16
0 0
전해웅 (211.XXX.XXX.35)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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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9 10:12:04
0 0
차덕희 (121.XXX.XXX.179)
글을 읽어도 그렇지만 대화를 할때,가끔씩 있는 일인데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사람마다가지고 있는 본래의 색이 있는데 자주 닦아도 조금씩은 때가 타네요.권력에의 욕심 무섭지요.동서고금을 통털어도 ......비일비재로 있는 일이고요.글을 써서 자신을 보이는 것은 지속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예요.잔가시,굵은 가시든 찔림이 있게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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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8 13:17:43
0 0
인내천 (112.XXX.XXX.244)
스스로는, 오해하기 보다 오해 받은게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오해일까요?~~^^
오해받는 것은 억울하지만 차라리 오해하는 것보다야 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피해를 주는게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다 보면 수많은 오해 속에 갇혀 살지만 개인간의 오해야 되돌릴 수 있지만 역사적이고 국가적인 오해의 폐해는 너무도 크고 되돌릴 수 없기에 마음이 아립니다

일제의 강점을 대한제국의 발전으로 여기거나,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묵인했던 미국을 은인으로 여기는 오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세종시에 대한,4대강사업에 대한 MB정부의 오해도 진행형 오해이고....
이런 판단도 오해일 수 있겠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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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8 10:25:2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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