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모임 무한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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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모임 무한한 우정

황경춘

2010년 02월 09일 (화) 01:00:26

상법(商法)에 유한회사(有限會社)라는 게 있습니다. 회사의 구성원들이 유한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사용됩니다. 이와는 좀 다른 뜻으로 사회단체에는 존속(存續)이 한정(限定)되어 있는, 즉 ‘유한’ 모임이 있습니다. 회원자격이 몇 년도 출생 또는 몇 년도 졸업으로 규정되어 있는 모임의 경우입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회 같은 단체도 이에 속합니다.

이런 모임의 경우 회원 나이나 경력에 제한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처럼 영구적으로 계속될 수 있는 성질의 모임이 아닙니다. 거의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동세대의 사람들끼리 모여 만드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1944년 1월 20일, 일본 전국 문과계열(文科系列) 전문대 ㆍ대학에 재학 중이던 4,385 명의 조선인 학생이 일본의 소위 대동아전쟁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학교뿐 아니라 일본본토 각지에 산재하는 모든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3년 11월 말 이전 출생 조선인 학생들이 이 긴급 동원령에 의해 학원에서 끌려간 것입니다.

이에 앞서 공포된 특별 징병법에 의해 그때까지 병역의무가 없던 우리 동포도 1923년 12월 1일 이후 출생한 남자부터 병역의무를 지게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징병법에 해당되지 않는 고령자도 전부 ‘지원’(志願)이란 미명 아래 강제로 동원된 것입니다.

약 300 명이 전쟁으로 희생되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구사일생 살아남은 분 가운데서도 광복 직후의 좌우 사상투쟁과 국토분단, 한국전쟁 등 격동기의 풍파를 거치는 동안 많은 분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연락이 되는 생존자 중심으로 1963년에 결성된 것이 현재의 1ㆍ20 동지회(同志會)입니다. 한때 1,300여 명이나 되던 회원은 점점 수가 줄어 지난 1월 20일 학도출진 6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한 회원은 불과 22 명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회원은 두 명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수도권에 거주하는 분이었습니다.

작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고, 이 밖에 소설가 한운사 씨를 비롯한 서너 명의 회원도 지난해에 타계하였습니다. 현재 국내에 생존한 회원은 217 명이지만 그 중 태반이 노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20세기 전반 우리나라를 괴롭힌 일제학정(日帝虐政)의 역사적 증인의 하나인 이 1ㆍ20 동지회가 앞으로 몇 년 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곽병을(郭秉乙) 회장대행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가장 나이 적은 회원이 금년에 미수(88세)를 맞이하니 그럴 법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이 고령자들의 학교 동기회나 한국전쟁 참전 용사회 같은 특정한 경험의 공유자(共有者)들 모임입니다. 1943년 3월 3일 제가 고등학교(당시 중학교)를 졸업할 때 동기생은 두 학급 합쳐 92 명이었습니다. 졸업 반세기를 기념해 1993년 4월에 경남 진주(晉州)에 있는 모교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생존이 확인된 동기생 수는 반을 겨우 넘는 47 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현재 병환으로 두문불출하는 친구를 합해 생존하는 동기생 수는 12 명에 불과합니다. 저희들 기수가 14회이기 때문에 각지에서 동기회를 매달 14일에 가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약 25 년 이 모임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한때 20 명이 넘는 회원으로 술을 곁들여 활기에 넘쳤던 이 저녁 모임이 지금은 단 6 명의 80대 후반 노인의 쓸쓸한 점심자리로 변했습니다.

약 15 년 전부터 인사동의 한 식당으로 장소를 고정하여 모이고 있는데, 같은 집에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동기생 몇 사람도 매월 모이고 있다고 식당 사장이 전한 기억이 있어 그분들도 아직 모임을 계속하고 있느냐고 지난해에 물었더니, 우리보다 약간 연세가 위인 그분들의 월례 모임은 없어진 지가 오래라고 했습니다.

서울의 우리 동기생 모임은 지난해 출석률이 거의 100%였으며 마지막 두 사람이 남을 때까지 모임을 계속한다고 웃으며 말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이 타계한 후 남은 여섯 명은 비교적 건강하며 이 중 두 사람은 아직 시내 중심부에 개인 사무실을 두고 매일 출근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번 설 연휴 후 모임에는 역귀성으로 시골서 올라오는 친구 한 사람을 합쳐 7 명이 모일 예정이어서 모두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저는 일제 때의 대학 선배 두 분과 거의 매주 만나고 있습니다. 원래 네 사람의 모임이었는데, 보행이 몹시 불편한 한 분은 요즘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년에 구순에 접어든 두 선배 중 한 분은 기억력과 보행에 문제가 생겼고 다른 한 분도 청력이 많이 떨어겼습니다. 원래 목요일에 만나는 모임이지만 기상조건에 따라 융통성 있게 날짜를 변경합니다. 아파트에 사시며 기상뉴스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지 하루는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거동이 불편하신 선배가 모이자고 하여 제가 다른 날로 제안한 일도 있습니다.

이 세 모임 모두 특별히 정한 시기는 없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언젠가는 끝을 보게 되어 있는 ‘유한’모임입니다. 뒤를 이을 회원이 있지도 않고 또 대신 모임을 이어갈 필요도 없는 경우이지요. 향(香)이 다 타내려가 재가 되면 끝이 나듯 지금 있는 멤버가 타계하면 자연히 없어지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모임은 유한하지만 소중한 동지애와 우정은 무한하지 않을까요.

가끔 조용한 시간에 제가 걸어온 인생행로를 돌아보며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할 때, 얼마 남아 있는지 모르는 여생이나마 후회 없이 충실하게 살아보자고 새삼 다짐합니다.

변선환 (188.XXX.XXX.175)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데, 생존해 계시는 동안 후학을 위해
더 많은 말씀해 주셔야 하는데...
항상 귀감의 말씀 감사드리옵고,
강령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선생님 고향 남해에는 꽃봉오리 곱게 올라 올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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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0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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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연 (67.XXX.XXX.77)

황선생님 글을 통해 감동을 받고 배웁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4,385 명의 조선학생 중에 대동아 전쟁에 끌려나가 300 명만 죽었다는 것인가요?
몇 명 중의 300명이 죽었다는 것인가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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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17: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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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203.XXX.XXX.203)

끌려간 4,300 학병의 희생자가 300 명이었다고 합니다. 일반 징병과
지원병으로 간 희생자는 훨씬 더 많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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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09: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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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79)

많은 환난을 겪으시고 보신 연령이세요.고요한 연못가를 지켜보는 마음이 됨니다.유한한 모임에 대해서 담담히 써주신 담담함이 경이롭고 안타깝습니다.이별을 많이 하신 연령이 되면 황선생님 처럼 되시나 봄니다.건강하시고 건필 부탁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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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09: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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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203.XXX.XXX.203)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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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09: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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