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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방의 고배를 마셨을 때 -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
김이경 2010년 02월 17일 (수) 07:33:00
동갑내기 조카 둘이 며칠 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며 같은 초, 중, 고를 다닌 둘은 학과 공부에 열의가 없는 것도 비슷해서 이번 입시에서 둘 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낙방 소식을 듣고 눈이 팅팅 붓도록 울며 슬퍼했다기에 걱정했는데 졸업식에 온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은근히 배신감이 들더군요. 실패를 했으면 실망도 하고 반성도 하다가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시험에 떨어진 조카가 제 엄마에게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고, 자신이 없다고 했다는군요. 겉모습만 보고서 속없다고 흉본 것이나, 눈앞의 성패만 따지느라 그 마음을 모른 것이 참 미안했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하던 차에 필리프 프티의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를 읽고 주저 없이 선택했습니다. 땅 위에서 걷고 구름 위에서 춤추었으되 그 어디서도 승패를 묻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줄타기꾼 필리프 프티의 세계무역센터 횡단기’입니다. 부제 그대로, 이 책은 줄타기 곡예사 프티가 지금은 사라진 뉴욕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을 외줄 하나에 의지해 여덟 번이나 왔다 갔다한 이야기를 -다른 인생담은 거의 없고 오로지 그 이야기만- 담고 있습니다. 412미터 높이의 허공을 걸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그 이야기로만 300쪽이 넘는 책 한 권을 엮은 것도 처음 보았는데, 둘 다 상상 이상입니다.

네 살 때부터 뭐든 타고 오르기를 좋아했던 프티가 줄을 타고 쌍둥이 빌딩을 건너겠다고 맘먹은 것은 열여덟 살 때 일입니다. 치과에 갔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세계무역센터가 지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 순간, 쌍둥이 빌딩은 프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뒤 6년 동안 프티는 지상 최고의 마천루에 올라 “구름을 잡기” 위해 한 발 한 발 착실히 나아갑니다. 1971년 6월 26일 파리에서 노트르담 성당의 하늘을 걸은 것을 시작으로, 2년 뒤에는 호주로 날아가 망망대해 위에 우뚝 솟은 시드니항의 철교를 가로질렀습니다. 천사의 머리 위를 날고 푸른 바다 위를 걸었으니 이제 그가 갈 곳은 쌍둥이 빌딩뿐이었지요.

1974년 1월 뉴욕에 도착한 프티는 마지막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세계무역센터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빌딩 앞에 섰을 때, 프티의 귀에 외마디 외침이 들려옵니다. “불가능해!” 마음속에서 울려나온 외침은 그의 몸속 깊이 파고듭니다.

“불가능해! 불가능해! 더는 숨을 쉴 수 없다. 어림을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코 실현되지 않을 어처구니없는 꿈처럼 느껴질 뿐이다.… 헛수고라고.”

절망에 빠진 그는 자석에 끌리듯 빌딩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점 기댈 데 없는 옥상과 두 개의 옥상 사이의 텅 빈 공간을 확인하고 생각합니다.

“이를 악물고, 눈은 반쯤 감고, 공포와 기쁨에 젖어, 방금 떠오른 생각을 가까스로 속삭인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할 것이다!’ 그 순간, 그 빌딩들이 ‘나의 탑’이 된다.”

어쩌면 세상을 놀랜 성취의 대부분은 ‘불가능하니까 한다’는 이런 무모함에서 비롯하는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그 결과에 따라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으냐 아니냐를 묻고 제 마음을 좇아 도전하는 것이지요.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도전 상대를 본 순간, 프티는 자신의 도전이 불가능함을 압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그의 가슴은 가능을 꿈꿉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그는 집요할 정도의 조사와 연구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책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그 내용으로 채워질 만큼 지독히 길고 힘든 과정이었지요.

때문에 책을 읽노라면 처음엔 그렇게 높은 데서 줄타기를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나중엔 성패를 알 수도 없는데 그 힘든 과정을 견뎠다는 것, 그리고 그 무모한 도전을 몇 년씩이나 함께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됩니다.

   
여기, 1974년 8월 6일 아침, 프티가 세계무역센터의 남쪽 빌딩에서 북쪽 빌딩을 향해 걸어가는 사진이 있습니다. 부연 창공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직선과 그 선을 버티는 두 개의 고정 줄, 그리고 장대를 손에 들고 선 위를 걷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사진 속의 남자는 허공에서 웃고, 허공에서 눕고, 허공을 달립니다. 그는 혼자입니다.

하지만 좀 더 꼼꼼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저쪽 줄 끝에서 남자를 향해 환호하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면 다른 쪽 건물에서 이 사진들을 찍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프티와 함께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그와 함께 몰래 줄을 옮기고, 밤을 새워 줄을 매고, 그를 격려하고, 그의 모습을 기록하고, 그와 경찰서까지 함께 끌려간 친구들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프티는 하늘을 걷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돈도 명예도, 어떤 보답도 없는 일에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들의 친구가 공중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가 구름 위에 서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공중을 걷는 프티의 남다른 재능을 소중히 여겼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열정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프티는 계속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첫 관문에서 고배를 마시고 시름에 잠긴 조카애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그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과감히 꿈꾸고 힘껏 도전하되, 남을 위해 함께 꿈꾸는 사람이 되라고요.

원아, 희야! 너희들이 감히 구름 위를 걷겠다고 나서도 좋고, 누군가 구름 위를 걷도록 도와줘도 좋겠구나. 어느 쪽이든 너희 덕분에 세상은 좀더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 나는 언제나 너희를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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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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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39)
삶이 힘들 때,중용과 채근담을 읽고 마음을 지킨 때가 있었습니다.이경씨 조카들이나 그 비슷한 청춘들이 고비를 이겨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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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9 11:25:46
0 0
태양처럼 (211.XXX.XXX.146)
크리프 프띠의 모험은 감동적이네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답변달기
2010-02-17 09:44:1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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