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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팔순 잔치
신아연 2010년 02월 25일 (목) 01:12:22
지난 주말 아는 어른의 팔순 잔치가 있었습니다. 친정 부모님이나 시댁 어른들의 팔순을 의미있게 맞이한 적이 없었던 탓에 초대를 받아 가면서도 어떤 모습, 어떤 내용으로 진행될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표현은 '잔치'라고 했지만 '축하예배'로 대신 한다니, 알록달록한 한과와 색색의 과일을 목전까지 잰 상 앞에 한복으로 치장한 아들 손자 며느리가 순서대로 나와 절을 하고 밴드에 맞춰 춤추며 노래하는 다소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짐작이 크게 어긋나지 않아 노부부의 한복차림과 부모의 80회 생신을 맞아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빼고는 특별히 표나거나 요란함이 없는 조촐한 모임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소박하고 자연스러워 모르는 사람끼리 앉았는데도 어색하거나 거북함없이 모처럼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진행 순서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니 80성상을 보낸 한 사람의 삶 속에 두 사람 분의 시간이 녹아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간 길임에도 족적은 하나입니다. 터널을 통과하듯 삶의 긴 시간들을 지나는 동안 마디마디 매듭지어진 스냅사진 속에도 부부는 한몸인듯 합니다.

시간의 눈금처럼 생의 정지된 한 때를 담고 있는 사진들, 그리고 연이은 다음 사진과의 간격에 빼곡이 메워져 있는 그 가족의 역사를, 초대받은 자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 분들의 삶도 모두의 그것처럼 대부분은 고단하고 이따금 웃으면서도 생명을 주신 이에 대한 감사와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여정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사진과 사진사이'를 상기하는 두 분의 표정에는 숙연함과 아쉬움, 안도감과 담담함 등이 순간순간 깃들며 교차합니다. 가족들의 지난 세월을 영상으로 되짚으며 간간이 젖은 눈가를 찍어내는 늙은 아내 옆에 나란히 앉은 팔순의 남편은 어떤 정서에 빠져들고 있는지 슬몃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단아한 분위기의 큰며느리가 시어른의 팔순 축가를 부릅니다. 첫소절부터 비감에 젖는가 싶더니 내내 울먹이느라 끝내는 곡을 마무리하지 못합니다. 성경 구절 속의 사랑의 정의가 가족들이 감내한 시간을 건드린 탓인가 봅니다만, 딸도 아닌 며느리로서 시집의 정서에 흠뻑 동화된 모습이 또다른 감동을 줍니다.

다음은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내의 하모니카 연주, '즐거운 나의 집'이 이어집니다. 이 곡의 작곡가는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는 독신남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문득 납니다. 말하자면 '홀아비가 품은 가정에 대한 환상'이 만든 노래라는 겁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배신감' 같은 게 느껴졌지만 그 노랫말이 '환상'이 아닌 '진실'임을 이제는 압니다. 그것은 어느 시구처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은 결코 모르는, 인생을 살았어도 헛살아버린'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변증적 진실'입니다.
어쩌면 노부부의 여로는 '즐거운 나의 집' 이전에 '즐거워야 할 나의 집'이라는 당위성을 향해 쉼없이 밀고 당기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경황 중에 지금 여기에까지 당도했는지도 모릅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인지 모른다.'

당장 제목도 지은이도 기억나지 않지만 위에 인용한 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노부부 역시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뎠기에 그 날의 팔순잔치를 맞았다는 데 생각이 다다릅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사랑의 족적이 가정의 울타리를 온전히 지켜내며 거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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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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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121.XXX.XXX.59)
"한 사람의 삶 속에 두 사람 분의 시간이 녹아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간 길임에도 족적은 하나입니다. 터널을 통과하듯 삶의 긴 시간들을 지나는 동안 마디마디 매듭지어진 스냅사진 속에도 부부는 한몸인듯 합니다.' 문장이 참 좋습니다. 곱게 잘 다듬어진 글 흐름이 부럽습니다. 여러 번 읽었습니다.상대를 배려하고 애끼면 두 몸이 두 몸으로 있어도 아름답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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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5: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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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03.XXX.XXX.182)
부족한 글을 늘 칭찬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아낀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제가 잘 하는 비유중에 소는 풀 뜯어다 사자한테 던져주고 최상의 배려를 했다고 하고, 사자는 피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 잡아다 소아내에게 던져주고 의기양양한다는 말.. 두 사람이 맞춰 산다는 것은 그 비유만큼 힘들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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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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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12.XXX.XXX.244)
의미있는 팔순잔치를 철학적인 관찰로 소개해주셔서 숙연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굴욕을 견뎌야하는 시간보다 즐겁고 만족하는 삶이었음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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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5 10: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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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03.XXX.XXX.182)
의견 감사합니다. 연세드신 분들을 보면 그 연세까지 잘 견디며 살아오신 것 자체가 존경스러워 보입니다. 그 상으로 팔순 잔치를 하게 되시는 건데요, 그 또한 인생 여정의 한 매듭일테지요..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살면서 굴욕감을 진하게 느끼는 순간이 오더라도 또 넘기고 넘겨야 하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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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5 18: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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