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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도 을도 아닌 것이
신아연 2010년 03월 17일 (수) 01:43:03
"편집국은 좋겠어요. 늘 갑이니까요." 얼마 전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하던 광고국 동료의 푸념 아닌 푸념입니다. 그러면서 광고영업은 광고주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영원한 을'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편집국 기자로서 무조건 갑의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기에 뜬금없기도 했지만 광고 얻기가 힘들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좀 안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핏 갑인 것처럼 생각되는 기자라 해도 인터뷰나 취재, 원고 청탁이 거절될 때의 느낌은 사실 영락없는 을의 그것입니다. 광고국 동료의 말이 아니더라도 요즘 저는 불과 몇 달 전, 자유로이 글을 쓰면서 이따금 글 부탁을 받던 때는 갑이었는데, 다시 기자가 되어 이런저런 취재원을 만나면서 시나브로 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언론 용어로 취재원과 기자 사이의 관계를, 정보를 보호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캐내려는 입장이란 뜻으로 '적대관계모델'이라고 하니 제가 순전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갑과 을' 이라 하니 문득 오래 전에 읽은 짧은 글이 생각납니다. 평생을 촌부로 지독스레 가난하게 산 아버지가 아들은 의사가 되어 '갑'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일평생 '을'의 설움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순박하고 투박한 부정(父情)이 자식만큼은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있는 의사로 만들고 싶었던가 봅니다. 돈에 쪼들려 늘 아쉬운 소리를 하며 초라하게 살아오는 동안 자신을 비루하게 대했을 그 아버지의 인생이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여북하면 최근에는 <을의 생존법> 이라는 책까지 나왔겠습니까.

소개 부분만 들췄는데도 '눈물을 삼키고 울분을 참으며,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땅의 을들, 갑들의 세상에 맞서는 을들이 들려주는 필살기, 연약한 을이 갑을 이길 수 있는 전략'들이 넘칩니다. 도식적 전제로 세상에는 위세를 부리고 떵떵거리는 족속과 생존을 위해 냉대를 감내하는 저항적 반대편, 이렇게 두 부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니 지금껏 몸담고 마음 나누며 살아 온 세상이 갑자기 살벌한 한판의 대결구도의 양상으로 다가옵니다.

끝까지 읽지 않아도 '살다보면 누구나 갑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을이 될 수 있기에 영원한 갑과 을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호령하자고 의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한 동네에 한 집 건너 병원이 붙어있다면 여간 실력있고 곰살갑지 않고는 옆 병원으로 환자를 죄다 뺏길 테니 그렇게 되면 돈 잘 벌고 명예있는 '갑 의사'는커녕 오히려 병원을 골라잡을 수 있는 환자가 '갑'이 될 것입니다. 평소 일선교사가 장학사나 교육부 장관을 갑의 존재로 여긴다 해도 만약 그 사람들의 자녀를 담임하고 있다면 어떤 순간에는 양자 간 갑과 을의 느낌이 묘하게 교차되지 않겠습니까.

그 책에는 대기업 사장도 소비자 앞에서는 을이며 말단 직원일지라도 하청업체 앞에서는 갑이라고 예를 들어 놓았더군요. 싱거운 생각이지만 제가 일하는 <호주한국일보> 말고는 시드니 바닥에 교민신문이 하나도 없다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광고를 내려고 줄을 설 테니 그렇게 되면 광고국은 당장 갑으로 행세할 수 있겠지요. 하기사 지금도 '얄궂은 업종'을 꾸리는 분들이 어떻게든 광고 좀 내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요.

그러나 영원히 고정된 갑과 을은 엄연히 존재하며, 그 견고한 틀 속에서 극소수는 갑과 을의 역할을 완전히 뒤바꾸는 경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림하고 군림당하는, 지배하고 복종하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히 구분되는 현실 구조 속에서도 한 가지 공평한 것은 갑도 을도 삶이 혼돈스럽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란 점입니다. 경쟁과 욕망으로 점철된 현실의 삶에만 코 박고 있는 한, 한순간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둘은 공평하게 불행하며, 기쁨은 찰나적일 뿐, 허다한 시간이 공허와 허무로 메워지는 것도 똑같습니다. 반짝 의욕이 생기는 듯 하다가 이내 좌절의 나락에서 뒹구는 느낌도 갑과 을에 구분없이 찾아드는 쓰라린 감정일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나'로만 존재하는 한 삶의 의미도, 생에 대한 열정도, 내밀한 성취감도 밀도있게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생존력은 잡초처럼 성성하되 생명력은 뿌리조차 희미하여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 창조력을 상실한 채 고통을 당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자 일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의 에너지와 삶의 놀라운 비밀이 갑과 을의 틀로 옥죄어져 고초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대서야 아니 될 말입니다.
산다는 일은 자기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근원적 소명같은 어떤 의미를 깨닫는 것, 때에 따라 오욕조차 끌어안을 수 있는 총체적인 자기 존엄을 유지하면서 죽을 때까지 완성해 가는 여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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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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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무섭 (203.XXX.XXX.182)
신 아연 편집부국장님,

우리들 생활과 가까이 있는 소재들을 통하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들에 늘 큰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 갑과 을에 관한 말씀도 효과음이 큽니다. 둘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들여도 보면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심부에 있고 다른 하나는 주변부에 있습니다. 주변부에 있는 것의 서러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종속 되어 있는 사람의 비애와 슬픔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다 이해를 하겠습니까. 세상은 그렇다 치고 '나'와 '나안의 또 다른 나'와는 그런 갑을 관계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다만 '나'는 내 진실한 '삶'의 하인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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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08: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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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12.XXX.XXX.244)
석차의 갑을이나 계급적 관점의 갑을은 삭막하고 어둡지만 낮과 밤,여자와 남자,생산자와 소비자,저자와 독자,교사와 제자,경영자와 근로자,실과 바늘의 동반자적 관점이라면 따스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 사회는 엄연한 계급적 갑을이 무수히 널려 있지만 힘있는자, 가진자들이 먼저 손 내밀어 동반자의 길을 터준다면 아직 절망하기는 사치겠죠?(실제로 동반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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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15: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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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필립 (203.XXX.XXX.182)
갑도 을도 아닌 것이는 일단 재미있네요.
일상에서 깊은 관찰력으로 주제를 잡고
세밀한 마음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디테일이 역시 프로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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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07: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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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진 (203.XXX.XXX.182)
항상 잘 읽고 있읍니다. 호주 한국일보를 볼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마겠읍니다.
인터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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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07: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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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종 (203.XXX.XXX.182)
전 지금까지 갑과 을의 개념이 없이 반백년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한마다로 철?, 개념이 없거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왔지요. 그러나 이젠 정말 갑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갑의 능력이 없는 저에겐 그냥 자기합리화 중입니다. 갑을을 구분 짖지 않고, 동심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불편함은 그 불편함대로의 살아가는 맛이 있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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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07: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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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석 (221.XXX.XXX.88)
신아연 부국장님
'갑','을' 이야기 읽으며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정리되는 느낌과 살벌해지는 느낌이 왔습니다.

'을'인 자신이 억울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분들도 생각났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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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7 09: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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