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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고 깊은 밤
임철순 2007년 03월 09일 (금) 10:49:27
잠이 오지 않습니다. 눈꺼풀이 뜨겁고 무겁고 아리고 아픕니다. 잠은 눈꺼풀을 통해 들어오는데, 눈을 감기가 어렵습니다. 불면은 결국 눈꺼풀의 무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잠들 수 있을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이렇게 세어 볼까? 잠에 관한 박희진의 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죽음보다 깊은 잠, 평화롭게 잠자는 동물들을 등장시킨 대한항공의 광고…. 벼라별 생각을 다 해 봅니다. 말처럼 선 채로 잘 수 없을까?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리면? 아니, 물고기처럼 눈 뜬 채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엇이 나를 낮 동안 휘저어 놓았는지 오늘 밤은 잠들지 않고 이제껏 깨어 있다. 뒤척이며 2시를 넘긴다. 책에선가 어디선가 섣불리 배워 들인 이 철없는 불면, 뜻 모를 안간힘.

30여년 전에 쓴 글입니다. 이 글을 지금도 외우고 있는 걸 보면 그 때의 불면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나 봅니다. 당시 나를 휘저어 놓았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처럼 잠들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시계소리가 이렇게도 컸던가? 보무도 당당한 시간의 발걸음을 들으며 뒤척거리다가 거실로 나왔습니다. 소파에 눕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강아지가 올라와 담요를 덮은 내 가랑이 사이에 몸을 꼬부립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최선의 자세로 사람과 개가 비좁은 소파에서 잠을 청합니다.

30여년 전 성북구 보문동의 하숙집. 내 방의 바로 앞에 시커먼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늙고 큰 개가 짖으면 귀가 멍멍할 정도였고, 한밤중 개의 긴 한숨은 베개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습니다.

늙은 개는 밤잠을 자지 않는다/무엇인지 그저 지켜 앉아서/땅으로 오는 소리를 다 듣고 있다/사람처럼 이따금 한숨을 더럭더럭 쉬면서//개도 이미 알고 있다/자고 나도 자고 나도/또 자야 할 잠이 있다는 것을/앞 방의 젊은 녀석/아직도 잠 못 자고 있다는 것을//

옛 노트에 1973. 8.23이라고 기록돼 있군요. 이런 어쭙잖은 시를 쓰면서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토마스 만의 주제처럼 ‘예술가가 될 것인가, 시민이 될 것인가’하며 제 멋대로 고민을 했습니다. 대단한 예술적 재능이라도 갖춘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뒤 어쨌든 나는 무엇인가 되었고,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고민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떨구고 잠들거나 코를 골다가 깨어 보면 영화는 거의 끝나 있습니다. 그런 멍청한 사람들을 경멸하던 내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대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고 늙었나. 30여년 전의 내가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의 그 개는 늙었고 컸고 나는 젊었고, 지금 이 개는 작고 어리고 나는 늙었네. 그 때의 그 개는 나와 떨어져 방 밖에 있었고 지금 이 개는 나와 공침(共寢)을 하고 있구나. 그 개는 버얼써 죽었을 테지. 지금은 내가 늙은 개가 된 기분이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대단한 삶의 비의(秘義)나 상징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잠시 스스로 대견해집니다. 이런 걸 잘 쓰면 좋은 글이 되겠다고 좋아하면서.

대체 지금이 몇 시쯤일까. 벽시계의 빨간 디지털 문자가 흐릿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도 충분히 늙었습니다. 화장실에 가느라 할 수 없이 일어서서 들여다 보니 3시 20분. 다시 소파에 돌아와 누우니 엘리베이터의 벨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 신문을 던져 놓는 소리, 탁도 아니고 턱도 아니고 착도 아닌, 신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 부피를 가늠하게 만드는 소리.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30여년 전의 그 밤들에는 실로 많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는 것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가 목이 마른 듯 음수대의 물을 세차게 빨아댑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아기처럼 낑낑거립니다. 이 작은 녀석에게도 작은 한숨이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 좀 자야 할 거 아냐? 얘야, 이제 그만 잠 좀 자자, 응? 너는 이제 뭘 봐도 느낌이 없을 만큼 잘 무뎌지고 둔해지지 않았니? - 그래도 잠은 오지 않습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습니다. 잠이 오면, 머리에 인 물동이에서 물이 흐르지 않게 조심하듯이 잠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를 놓치자 잠이 쏟아져 나가 버린 것입니다.

대체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하나요. 그 밤과 불면에 관한 생각이 지금도 죽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할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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