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곡(號哭)하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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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곡(號哭)하는 문화

방석순

2010년 04월 29일 (목) 00:49:58

꽃피는 5월, 그 화창하던 계절에 훌쩍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었습니다. 벌써 10여 년 전 일입니다. 늘 넉넉한 성품이었기에 가족들은 물론 같은 또래나 후배들도 무척 좋아하던 친구였습니다. 나이든 부친이 위장암을 이기고 거뜬히 일어났는데 한창나이의 친구는 간암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

친구의 영구(靈柩)가 장지로 떠나던 날 상제(喪制)가 된 두 아들은 슬픔에 젖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소리쳤습니다. “이놈들아. 곡을 해야지!” 두 아이는 소매로 눈물을 문지르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했습니다. 정작 곡에 그 아이들의 슬픔이 실리지는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곡소리를 의식하다보니 슬픔은 오히려 거기 짓눌리고 만 것입니다.

다른 장례식에서 본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상주와 그 형제들이 굴건에 상복 입고 지팡이까지 짚고 섰다가 조문객만 나타나면 “아이고” 소리를 맞춰 곡을 했습니다. 너무도 하모니가 잘 이뤄져 무슨 영가를 합창하는 것 같았습니다. 틈틈이 “아무개 왔느냐?” “손님 상 들여라!” 오만 가지 참견까지 하느라 곡은 그저 건성으로만 보였습니다.

집안에 상사가 나면 자연스레 울리던 곡이 조선시대부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아예 장례의식으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슬픔의 농도와 호곡의 높이가 일치할 수야 없겠지요. ‘상제가 울어도 제상에 가자미 물어 가는 것은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대곡제(代哭制)까지 생겨났겠습니까.

천암함 침몰 사고로 나라 전체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 분향소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분향을 마치고 눈물을 훔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졸지에 세상을 떠난 천안함 장병의 유족들이 느끼는 슬픔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처음 사고 소식에 접한 날부터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의 오열(嗚咽)은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슴 찢어지는 슬픔은 오히려 장례절차를 마치고 제각기 제 삶으로 돌아갈 때 더욱 아프게 찾아올 게 분명합니다.

국가애도 기간이던 지난 26일 밤 KBS는 ‘챈스 일병의 귀환(Taking Chance)‘이라는 영화를 방영했습니다. 이라크전에 파견됐다 숨진 한 미군 병사의 유해를 그 유족들에게 전하는 과정을 담은 실화라고 합니다.

본토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해병대 중령 마이클은 어느 날 전사자 명단에서 자신과 출신지가 같은 열아홉 살의 챈스 일병 이름을 발견합니다. 늘어가는 젊은 병사들의 죽음에 자괴하던 마이클은 챈스의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하는 일에 자원합니다.

물론 아무런 위험도 특별한 해프닝도 없습니다. 마이클이 델라웨어 주 도버 공군기지에서부터 챈스의 유해와 유품을 넘겨받아 부모가 사는 와이오밍 주 작은 마을로 운구하는 동안 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바싹 깎은 머리, 오뚝한 콧날에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사자의 유해와 운구의 공무를 수행하는 자를 대하는 일반 시민들의 깍듯한 언행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에 대한 그 사회의 경건한 자세를 보게 됩니다.

죽어서 돌아온 챈스 일병은 두 명의 아버지와 두 명의 어머니가 맞습니다. 친아버지와 그의 새 부인, 친어머니와 그의 새 남편. 1980년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부모(多父母; poly-parents)’의 전형입니다.

친아버지는 마이클에게 조용히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친어머니는 챈스의 유해에 쓰러지듯 엎드려 체읍(涕泣)합니다. 더 이상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이클은 이혼한 부부에게 각각 미국 대통령이 증정하는 성조기를 전달합니다.

이런 밋밋한 영화가 어떻게 미국에서 주목받게 됐을까요? 뻔한 스토리에 거수경례뿐인 액션으로 마이클 중령역의 배우 케빈 베이컨(Kevin Bacon)은 골든글로브상과 미국배우조합상을 받았답니다. 우리보다는 훨씬 요란스럽게 사는 것 같은 미국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것인가 봅니다.

미 제국주의 영화라고 펄쩍 뛸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성적이라거나 침착하다고 추켜올릴 이유도, 냉혈 인간들이라고 깎아내릴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비슷한 상황을 우리와는 다르게 소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비교해볼 좋은 기회일 뿐입니다. 비극의 당사자들이 슬퍼하는 모습에서부터 주위 사람들이 위로하고 애도하는 자세까지.

일반가정의 상사에서도 국가적인 재난에서도 슬픔을 나타내는 모습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쪽 감정 표현이 좀 더 격정적이고 폭발적이지 않은가요? 원래 한이 많아서 그런지, 정이 넘쳐서 그런지,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부는 천안함 희생자들을 전사자로 결정했습니다. 전원이 1계급 특진되고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생떼 같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바친 것으로 나라가 공인하고 유족들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좀 더 의연한 자세를 갖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안함과 관련된 모든 결정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여론을 의식했거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앞서 간 서해해전 전사자들과의 형평성도 생각하고, 천안함 구조에 나섰다가 함께 실종된 어선 금양호의 수습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사자들에 대한 애도나 훈공 포상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게 도리입니다. 그보다는 국민 모두가 가슴속에 그들이 치른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느냐가 더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진덕규 (121.XXX.XXX.244)

방석순 님의 좋은 글 100% 공감합니다. 정말 좋은 지적이시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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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15: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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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58)

청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이란,기쁨은 잠깐 슬픔은 오래가는 시점 같습니다.왜 이런일이 생겼는지 ...,절망의 마음을 겪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영사기의 필름처럼 지나감니다.잊지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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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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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오태 (121.XXX.XXX.244)

정말 공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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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15: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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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방 (121.XXX.XXX.244)

전적으로 동감 합니다. 이글의 내용이 많은 이들께 읽혀 잔향이 일었으면 합니다. 요란하고 소란하지 않은 추도가 오래동안 죽은이들을 잊지않게 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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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15: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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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121.XXX.XXX.244)

100% 공감합니다. 차분한 사선과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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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15: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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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03.XXX.XXX.182)

의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속에서 여러가지를 말씀하셨듯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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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9 12: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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