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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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사대주의

임종건

2010년 05월 18일 (화) 00:36:17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김정일의 이번 방중 목적에 대해 많은 분석이 있었습니다만 방중 결과에 대한 양측의 발표로 미루어 북한의 권력승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의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정일과 후진타오(胡錦濤)중국 국가주석 간의 회담에서 김정일은 후에게 “양국 선대 지도자들이 손수 맺어 키워낸 전통적 우의관계는 시대의 풍파와 시련을 겪었지만 시간의 흐름과 세대교체로 인해 앞으로 변화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 중국 측 발표입니다. 김정일은 7일 평양에 도착한 뒤 후에 보낸 감사전문에서 “조중 친선이 두 나라 당과 인민의 공동 노력에 의해 대를 이어 보다 훌륭하게 강화, 발전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관련해 후는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양국 우호관계를 시대의 흐름과 함께 발전시키고, 대대손손 계승하는 것은 양국의 공통된 역사적 책임”이라고 말한 것으로 발표됐습니다.

김정일의 발언 중 ‘세대교체’ ‘대를 이어’를 언급한 대목과 후가 말한 ‘대대손손’이란 용어가 눈길을 끕니다. 김정일이 ‘세대교체’를 말하는 톤은 매우 절절해 그의 아들 김정운으로의 후계를 의중에 담은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반면 후가 말한 ‘대대손손’은 ‘김씨3대’를 지칭하는 한정(限定)명사라기 보단 보통명사처럼 들리는군요.

중국이 김정운으로의 후계에 대해 달가운 입장은 아닐 것입니다. 공산주의 원칙으로 봐도 그렇고, 중국의 권력후계 방식으로 봐서도 그렇지요. 마오쩌둥(毛澤東)만 죽을 때까지 1인 독재체제를 지속했을 뿐 그의 후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죽기 전에 후계체제를 만들어놨고 덩 후로는 생전에 권력교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공산체제의 중국에서 마오 사후 그의 처인 장칭(江靑)이 주축이 된 4인방에 의해 혈족세습이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 이 시도는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저지됐고, 그 후 덩, 장쩌민(江澤民)에 이어 현재의 후진타오 체제로 이어졌고, 차기 주석으로 시진핑(習近平)이 내정된 상태지요. 안정적인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련에서도 스탈린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등의 강력한 독재자들이 있어 죽을 때까지 권좌에 있었으나 이후 러시아에선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에 이어 현재의 메드베데프에 이르기까지 생전에, 투표에 의한 대통령 교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7세의 김정운에게 권력이 3대째 세습되는 것에 중국이나 러시아가 흔쾌할 리는 없을 겁니다. 김정일이 다리를 끄는 병구(病軀)를 이끌고 중국에 찾아가야 했던 것은 후계문제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자책봉을 위해 중국의 승인을 얻어야 했던 조선왕조 시절을 상기시킵니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몸소 가기보다는 사절을 보내 허락을 받아왔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김정일의 행각은 그 때보다도 더한 사대입니다.

북한은 이른바 ‘주체’의 나라입니다. 이론적으로 사대를 할 대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에 힘이 없으면, 또 잘못된 행동으로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 하나뿐인 이웃이 있다면 더욱 노골적인 사대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대는 국민의 안위나 행복은 아랑곳없이 집권자의 안위만을 위한 사대라 남의 눈에 더욱 구차해 보이기 마련이죠.

후계문제와 더불어 김정일을 더욱 절박하게 한 것은 천안함 사건이었을 겁니다. 연초부터 줄곧 제기됐던 김정일의 방중설이 3월 들어 더욱 증폭되던 중 3·26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그가 방중 일정을 미룬 것은 천안함 사건의 진행에 대한 내부의 정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후폭풍까지를 염두에 두고 나름으로 시기를 조율했다는 가정도 해봅니다.

곧 발표될 우리 측의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는 북한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이지요. 그러나 북측으로선 천안함 사건 자체가 권력후계 과정에서 내부결속용으로 기도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중요도로 보면 권력후계의 하위개념이라 하겠죠. 권력후계를 위해서라면 천안함 사건을 능가하는 짓도 저지를 수 있다고 봐야지요.

조중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사건이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측 발표인데 어떤 형식으로든 얘기야 있었겠지요. 김정일이 결백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아무렴 당신이 그럴 리가 없지”라고 맞장구를 칠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고, “당신 말이 맞기를 바란다”고 언중유골을 표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중국이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강조하듯이.

다른 하나의 의제였던 6자회담 복귀문제는 천안함 사건의 종속변수라고 할 수 있겠죠. 김정일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기를 희망한다”고 복귀 가능성을 앞세웠더군요. 천안함 사건에 대한 그들 방식의 물타기 작전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핵 포기를 담보하지 않는 한 하나마나한 얘기지요. 최근 들어 북측이 ‘핵융합 기술 확보’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 점이 더욱 명확해 보이죠.

경제협력 문제가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의제였겠지만 이렇다 할 내용은 없더군요. 중국도 맘에 안 드는 짓만 골라 하는 김정일에게 떡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북한이 정상적인 체제라면 의제의 타당성은 제쳐놓고라도 순서나마 경제협력-6자회담 복귀-천안함 변명-권력후계 지지 부탁으로 역순(逆順)이 되어야 하겠지요.

핵개발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3대후계 망상에 빠져 있는 김정일은 권력후계를 위해서라면 어떤 시대착오적인 짓도 능히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를 앞둔 시점에서 앞으로 우리는 이 점을 늘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