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 며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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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 며느리들

방석순

2010년 06월 01일 (화) 00:34:47

요사이 FM 방송의 아침 음악이 영 시답잖습니다. 아침상을 차려놓고 듣기에는 너무 소란스럽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너무 많아 신경 쓰이기도 합니다.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하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면 좋겠는데… 그래 봐야 들어줄 리도 없고 해서 PC에 저장된 음악을 오디오로 연결했습니다.

마침 존 바에즈가 부르는 ‘매기의 추억’이 흘러나왔습니다. 밥숟갈을 뜨다 말고 아내가 뜬금없이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저 노래 혼자 부르곤 하셨지요?”
“음, 그런 것 같아.”
“그 연세에 저런 노랠 어디서 배우셨을까요?”
“글쎄. 소학교도 못 다니셨는데…”
잠시 말없이 노래를 듣던 아내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쥡니다.
“왜 그래? 우는 거야?”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목이 꽉 메요. 좀 더 잘해 드릴 걸.”
속으로 원, 효부(孝婦) 났네,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돌발상황에 놀라서
“당신 잘 하느라고 했어.”
하며 달랬습니다.

이 좋은 봄날 아침 왜 돌연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났을까요? 이제야 철이 나서? 세상살이가 심난해서?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아내는 참으로 긴 사연을 나눈 사입니다. 대학시절 제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 아내 될 사람과 연애질을 시작했었지요. 처음엔 기타를 빌려주고 받다가, 함께 노래하다가, 영화 한두 편 보다가 어느 새 정이 들고 만 것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얼마나 화를 내며 반대하셨던지요. 어머니가 사주신 기타는 당연히 박살이 났고 온 집안에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어디 별나게 잘난 데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던 그녀에게 왜 그렇게 빠졌던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골서 막 올라온 그녀의 순박함에 반했던 걸까요(충주를 시골이라 하면 또 화를 낼 테지만). 어쩌면 화장기 한 점 없는 얼굴에 약간은 촌스러운 이름까지 합세해서 제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아내에게서 자랑할 만한 구석이라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에 호박처럼 무른 귀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오죽 힘들었을까요.

집안 공기는 어수선하고 마음은 혼란스럽고…그래서 둘은 중대결단을 내렸었습니다. 상당 기간 멀리 떨어져서 서로의 마음을 가늠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우리 결혼하자”면서. 그녀는 돈도 벌고 더 넓은 세상 구경도 할 셈으로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고도 편지는 한 주일에 두어 번씩 부리나케 오갔습니다. 학교 우체국의 착한 여직원이 알뜰히 편지를 모아 주곤 했습니다. 더러 눈물로 얼룩진 편지도 있었습니다.

아, 이건 운명인가 보다. 도저히 떨어질 기미가 없이 다시 만난 둘이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그렇게 완강히 반대하시던 어머니도 마침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래, 인위적으로 안 되는 일이니 어쩌겠어.” 하시면서.

그렇게 얼렁뚱땅 결혼한 후 출장이다 야근이다 꽤 바빴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일부러 드러내어 서로 흉을 보다가 핀잔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선수를 쳐 어머니께 먼저 털어놓는 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점차 막내며느리에게 마음을 여는 눈치였습니다. 훨씬 나중 얘기지만 형수님은 “마음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시어머니 사랑은 막내가 혼자서 홈빡 다 받아갔다”고 시샘하듯 말했습니다.

거기 비하면 30여 년 간 어머니를 모시고 산 형수님이야말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홀로 겪은 편입니다. 어머니의 노염을 살 말이지만 보통 깐깐하고 엄한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어머니’ 하면 정겨움보다 먼저 떠오르는 게 대꼬챙이처럼 꼿꼿했던 성품입니다. 남편 생사조차 모른 채 얼떨결에 다섯 어린 남매를 이끌고 피란 내려와 낯선 타향에서 살아가며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길 거부했던 분이셨지요.

중년 시절의 어머니는 '감초 아줌마'로 통했습니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뛰어들어 중재했고, 심지어 부부싸움에도 단골로 불려 다녔습니다. 부산 대신동 산기슭에서 보수동 언덕배기로 이사 가던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서서 이불보따리, 솥, 단지들을 머리에 이고 줄지어 이삿짐을 나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 시어머니 아래서 된 시집살이를 해낸 형수님에겐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때로 어머니가 젊은 시절의 총기를 놓치고 터무니없는 구박을 해도 용케 견뎌냈습니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곧 세상을 뜰 즈음 형수님이 어머니 얼굴과 머리를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마치 아기 어르듯 시중들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에는 형수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합니다. 집안일로 모였다가 헤어질 때면 김치다 장이다 가릴 것 없이 푸짐하게 퍼서 아내 손에 들려줍니다. 아내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잘도 받아들고 나옵니다. “당신 친정어머니 같아!” 하면 아내 얼굴이 도리어 환해집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형수님은 여전히 어른 구실로 힘이 들고, 아내는 여전히 막내며느리로 사랑받습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장 호된 방식으로 이 집안 며느리들에게 질서와 사랑을 가르치신 걸까요.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아들의 관계, 이 고도로 복잡하고도 어려운 방정식은 가르치는 방식도 배우는 방식도 가지가지인 듯합니다. 거기서 하나라도 제대로 챙겨야만 제 몫의 복이 되는 거겠지요.

방석순 (121.XXX.XXX.244)

집안 얘기를 꺼내 좀 부끄러웠는데 그래도 공감하는 데가 있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家和萬事成, 부디 가내 태평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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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4: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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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운 (121.XXX.XXX.244)

음, 정말로 감동의 글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누구나의 입에서 넉두리처럼 흘러나올 만한 이야기인데 지금에 와서는 설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슬픈 일인지 시대의 흐름이라 당연한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괜시리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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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4: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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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서 (121.XXX.XXX.244)

참으로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생각도 막내인 나를 그리고 막내며느리를 아끼시던 것도, 첫째 며느리의 고생도......다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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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4: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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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섭 (121.XXX.XXX.244)

아들 넷 뒀다고 온 동네 부러움 샀던 당신이었지만 며눌 넷 두고는 평탄치 않으셨던 우리 어머님! 그러나 임종 3년 앞두고 둘째 며느리 수발받으며 행복한 마감하셨지요. 팔불출이라 해도 좋습니다. 내일모래 60 바라보는 나의 할멈에게 오랫만에 고맙다는소리 한 번 해 봅니다. 잘 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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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4: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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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121.XXX.XXX.244)

부부 간의 이야기는 절대 어느 한 쪽만의 것을 다 믿으면 안되지요. ^^* 저도 고교 시절 어머니께서 대신동 공설운동장 앞 문화아파트 지하시장에서 식당을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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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4: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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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16)

오랬만에 잔잔히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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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0: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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