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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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사대주의

임종건

2010년 06월 02일 (수) 03:40:52

지난 5월18일 ‘북한의 사대주의’ 제하의 칼럼에서 나는 김정일체제가 권력의 3대 세습을 위해 중국에 사대(事大)해야 하는 상황을 얘기한 바 있습니다. 원래 북한의 사대는 해방공간에서 구 소련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소련은 북한으로는 사상의 조국이었고,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자로 등극하는 과정이나,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후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국공(國共) 내전으로 경황이 없었던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공산정권 수립 이듬 해인 1950년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조·중 사이를 혈맹관계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과 소련이 이념과 국경으로 다툴 때 북한은 잠시 중·소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다가 중국으로 기울기 시작해 소련의 해체 이후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동맹에서 보통의 관계로 격하됐습니다. 조·러 관계의 냉각은 조·중 밀착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겠지만, 조·러 간의 지정학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약화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는 정상회담의 빈도나 형식을 보면 가늠이 됩니다. 상대 쪽에서 오지는 않고 한 쪽에서 가기만 하는 정상회담은 사대적 성격을 지닙니다. 냉전시대에도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을 수차례 방문했지만 중국과 소련의 국가원수는 북한에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경우 마오 주석은 물론 덩샤오핑(鄧小平)도 부수상 시절에 한번 방북했을 뿐 최고지도자가 되고 나선 평양에 간 적이 없습니다. 조·중 간의 평양 정상회담은 2001년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의 방북 때가 사실상 처음이었습니다. 소련과 러시아는 더 심해 스탈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서기장이나 대통령 중 2000년의 푸틴 대통령의 방북이 유일합니다.

1990년대 초 국교를 튼 뒤로는 오히려 우리의 대 중국 및 러시아 외교가 북한 보다 훨씬 활발합니다. 양국의 국가원수가 서울을 빈번히 방문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도 두 나라를 방문하고, 국제무대에서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반면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및 옐친 대통령은 북한에는 가지 않은 채 한국만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한·미 간에는 1960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이후 임기 중 암살 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이 최소 한 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했고, 우리의 역대 대통령도 재임 중에 빠짐없이 미국에 갔으며, 국제회의에서 만나 수시로 정상회담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미 관계도 사대주의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양국 간 이해관계의 긴밀성과 상호의존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대주의 차원을 넘은 관계라고 봅니다.

그러면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6·25전쟁을 했고, 핵개발을 둘러싸고 대결하는 양상이니 일단 적대관계로 보이지요. 김일성 시절에 푸에블로호 나포(1968년) 판문점 도끼만행(1976년) 등의 군사대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론 어떤 형태이건 북한이 미군 또는 미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미국이 한 때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제재를 가했던 것은 미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하는 중동국가들에게 무기를 공급했을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보복의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천안함처럼 공격을 당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은 제3차 세계대전을 각오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도발일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테러는 북한도 감당키 어려운 부분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핵문제를 제외하곤 북한의 대미정책은 매우 유화적입니다. 미군의 유해를 찾아서 돌려주는 데는 성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은 거기에 보상을 해줍니다. 얼마 전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미국인 여기자와 재미동포 목사가 있었죠. 비슷한 시기에 억류됐던 남측의 개성공단 근로자 석방 과정과 대비됐습니다. 외국인 납치사건도 일본인에 집중됐지 미국인은 아니었습니다.

핵문제도 핵무기로 미국과 대결하겠다는 게 아니라 핵보유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앙탈의 성격이 짙습니다. 남한을 지원해서 경제강국을 만들었듯이 북한도 지원해달라는 앙탈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하겠죠. 이런 북한의 한·미 이간 책동을 상징하는 말이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이죠.

미국은 실용과 합리의 나라입니다. 남한의 정부가 북한처럼 실용과 합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통미봉남은 없다고 봐야지요.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적대한 일본과 독일을 부흥시켰고, 패전한 베트남과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9·11테러 때문에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지요. 북한이 하기에 따라 북·미관계는 협력도, 대결도 될 수 있죠. 이런 점을 외면하고 우리 내부에서조차 통미봉남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북한의 대미 사대주의에 놀아나는 결과가 된다고 봅니다.

이처럼 북한의 미국에 대한 온순한 자세를 저는 ‘적대적 사대주의’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말로는 한국과 미국을 비슷한 톤으로 공격하면서도 테러만큼은 유독 남한 동족만을 겨냥하고 있으니 동족을 희생시켜 미국의 관심을 끌려는 작태가 사대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북한은 입만 열면 ‘민족은 하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정일 집단이 말하는 동족은 인권유린에만 해당되는 개념인 듯합니다. 남한 동족의 인명을 북한의 동족에 대해서처럼 하찮게 여기는 겁니다. 천안함 사건도 그렇지만 남북관계 경색의 시발점이 됐던 금강산 관광객 박광자씨의 북한군에 의한 살해사건에 대해 사죄를 거부하는 북측의 태도는 그 단적인 예입니다. 박씨가 미국인 또는 중국인이었어도 그랬겠습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김정일 체제가 수많은 주민을 굶겨 죽이든, 반대자를 즉결처분을 하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체제라는 점입니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죄업이 씻기지도 않은 채로 대를 이어 쌓이고 있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도 인권문제가 있지만 4.19혁명, 5.18민주화투쟁, 6.10항쟁 등 정권을 뒤엎었거나 사회의 변혁을 가져온 사건들은 공권력에 의한 무도한 인명살상에서 촉발되었듯이 인권의 무게가 저들과 같을 수 없지요. 김정일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점에서 김정일이 사대를 해야 할 대상은 중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북한의 주민이어야 합니다. 김정일이 천안함 사건으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야만적인 인명관(人命觀)을 깨우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moolsy (210.XXX.XXX.189)

차덕희님이나 다비님 제가 글을 쓴 이유를 정확히 이해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북한 주민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남한에서도 주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적도 있었지요. 지금 남한에서 그런 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됐지요. 그러나 북쪽에서는 그런 일이 여전 한듯합니다.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여하히 오래 누릴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지,쥐뿔 같은 권력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입니다. 권력이 약화됐을 때 주민들이 봉기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막기위해 발악을 하는 과정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인데 막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장성택의 군사위 부위원장 승진은 역성혁명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정은으로의 후계를 위한 인사라고 하는데 김가와 장가는 엄연히 다릅니다. 변화가 있겠지요. 3대 세습 대명천지에 말도 안되는 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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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8 23: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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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사대를 할 대상은 북한의 주민이어야 한다, 라는 말씀 깊은 공감을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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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8 11: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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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16)

야만적인 인명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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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0: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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