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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그들의 은밀한 속삭임
김이경 2010년 06월 08일 (화) 02:23:33

제게는 다섯 권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열서너 살 때 쓰던 하드커버의 분홍색 일기장부터 일기라기보다 금전출납부에 가까운 최근의 사무용 다이어리까지, 모양도 내용도 다른 일기장들입니다. 불규칙적으로 씌어진 예전의 일기들이 감정의 격랑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면, 매일 꼬박꼬박 쓴 최근의 일기는 건망증을 우려한 일상의 기록과 금전출납의 대차대조가 주를 이룹니다.

내용이 다르니 보관방법도 다릅니다. 옛날 일기장들은 책장 깊숙이 숨겨뒀지만 최근의 일기장은 책상 위에 태연히 꽂아두고 있습니다. 감춰둔 일기장들은,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내밀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일기의 본질이라고 속삭입니다. 반면 드러난 일기장은, 일기는 무엇보다 일상의 기록이라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어느 쪽이 일기라는 형식에 더 값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일기책들을 봐도 양쪽 입장이 팽팽합니다. 다만, 문학가들이 쓴 일기가 전자에 가깝다면, 역사가가 썼거나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일기들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김선형 역, 문예출판사, 2004)는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한 지 23년 뒤인 1986년 출판되었는데,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이 책이 나왔을까 싶을 만큼 솔직하고 격정적인 토로들로 가득합니다. 사실 플라스는 저 같은 평범한 여자가 보기엔 부럽기만 한 존재입니다. 십대에 이미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할 만큼 똑똑했으며, 외모 또한 영화배우 뺨치게 아름다웠으니까요. 하지만 일기를 보면 이 모든 것이 외부의 시선일 뿐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나보다 더 깊이 사유하고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외모도 뛰어나며 더 잘 사랑하며 더 잘 살아가는 이들을 질투한다.”는 고백은,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결핍과 불안에 시달리던 그녀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일기엔 또, 결혼 때문에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남자 없이 혼자 늙을까봐 걱정하는 지극히 평범한 속내가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결혼 뒤 그녀는 계속 시와 소설을 쓰고 투고했지만, 성공가도를 달린 남편 테드 휴즈와 달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1959년 11월 7일의 일기에서 그녀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심한 중년으로 스러져가는 느낌. 나는 수동적으로 변해, 테드를 나의 사회적 자아로 내세우려 한다.”고 토로하면서, 엄마와 주부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글쓰기에 대한 예전의 열정을 되살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몇 해 뒤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홀로 가난과 육아에 시달리면서 최고의 걸작 『에어리얼』을 씁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배신과 생활의 어려움이 오히려 잠들었던 그녀의 열정을 깨운 셈이랄까요.

플라스의 일기에는 같은 여성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깊은 공감과 자극을 받았다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울프의 『어느 작가의 일기』(박희진 역, 이후출판사, 2009)를 보면서, 원고를 퇴짜 맞고 청소로 위로하는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반가워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제 눈엔 오히려 두 여자의 다른 점이 보입니다. 일기 속의 플라스는 작가의 모습과 함께 집안일을 하는 주부와 엄마의 모습이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선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신분제의 잔영이 남아 있던 20세기 초 부르주아지 울프와, 남녀평등의 기치 아래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 1960년대 중산층 여성 플라스의 삶은 그만큼 닮은 듯 다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제목 그대로 ‘작가의 일기’입니다. 자살에 이를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일기 속의 그녀는 글쓰기를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설과 평론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그녀가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매번 주위의 평가에 노심초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토록 자부심 강한 울프가 호평에 안도하고 혹평에 잠 못 이루는 모습은, 독자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처지를 실감케 합니다.

그런데 남성작가인 존 파울즈는 좀 다릅니다. 1100쪽이 넘는 그의 일기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1․2』(이종인 역, 열린책들, 2010)는 파울즈가 『콜렉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후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재미있는 것은 플라스나 울프보다 주위의 평가에 초연한 듯한 그의 태도입니다. 특히 남편의 평가에 좌우되는 두 여성작가와 달리, 파울즈는 아내 엘리자베스의 혹평에도 그리 동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플라스가 남편과 이별한 뒤 인생 최고의 작품을 쓴 반면, 파울즈는 아내가 죽은 뒤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평소, 여성은 칭찬에 민감하고 남성은 여성을 거름 삼아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고 믿어왔던 제게는 이것이 그 증거로 여겨져 흥미롭더군요.

파울즈의 일기는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달고 있는데, 다양한 여성편력을 솔직하게 고백한 내용을 읽다 보면 그 제목처럼 파울즈가 주인공인 한 편의 긴 애정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신랄할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과 상대의 심리를 파헤친 이 자전소설은,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의 작품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작가들의 일기가 내밀한 고백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면, 서울대학교 사학과 강사였던 김성칠의 일기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 창비, 2009)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역사학자의 눈으로 기록한 보기 드문 자료로 눈길을 끕니다. 김성칠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엄중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의식했고, 역사학자로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기를 썼습니다. 그의 일기는 전쟁이라는 극한에 놓인 평범한 시민들의 고통을 생생히 전해주며, 이념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김성칠이 전쟁과 피난이라는 극한상황에서도 일기를 쓴 것은, 한국사에 면면히 이어져온 일기문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유명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비롯해서 여러 편의 일기가 전해집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북 예천의 함양 박씨 일가가 1834년부터 1950년까지 110년에 걸쳐 기록한 가문일기 『저상일월(渚上日月)』, 10세부터 63세까지 54년간 일기를 써서 남긴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 조선시대 최고의 개인일기로 꼽히는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 등이 있습니다.

이들 일기는 한문으로 쓰인 데다 워낙 방대해서 원전을 읽을 수는 없지만, 대신 박성수가 정리한 『저상일월』(민속원, 2003), 강신항 외 여러 학자가 함께 쓴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한국학중앙연구워, 2007), 정창권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2003) 같은 연구서들을 통해 그 내용과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의 속살이 궁금하다면 이런 일기책들을 훑어보며 옛사람의 마음을 상상해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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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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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25)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실감했고 그 끈기에 두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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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9 14: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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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211.XXX.XXX.40)
맞아요, 칭찬을 열망하는 사람은 그 열망 때문에 시들지요. 칭찬도 비난도 다 마음줄 것은 못되지만 그 중에도 칭찬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0-06-09 11: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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