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과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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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과 건망증

황경춘

2010년 06월 14일 (월) 02:49:50

지난 연말에 어느 가까운 분의 자제 결혼식을 까맣게 잊고 지나쳤다가 얼마 후에 다른 분의 귀띔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신체상의 변화는 스스로 느끼고 있었지만 뇌 활동까지 이렇게 둔해진 것을 발견하고 슬퍼진 것입니다. 결국 이런 현상이 점점 커져 치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섬뜩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엔 기억력이 좋은 아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 외가의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외할아버지로부터 거의 매일 밤 천자문을 배워 몇 달 만에 떼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는 기억력이 아니라 동물적인 암기력으로 글 뜻보다 음을 중심으로 외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암기력이든 기억력이든, 그 덕분인지 초등학교나 상급학교에서 성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영어 낱말이나 수학 공식을 외우거나 역사의 연대나 등장인물 이름 암기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해력보다 암기력이 더 필요한 영어나 역사 등 과목의 공부에는 물론 이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기억한다는 것은 쉽게 잊게 된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력을 앞세워 공부하는 버릇이 치밀성이나 과학성을 등한시하는 자기 성격의 약점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색각이상(色覺異常)이라는 선천적 신체결함 때문에 입학 당시부터 문과계 학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저는 이과계열 학과의 공부를 생리적으로 싫어하고 경시하는 공부 방침을 고집하다가, 끝내는 전쟁 수행에 다급해 진 일제의 문과계열 대학 학과 폐쇄라는 혁명적 교육정책에 희생이 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할 때 전화번호나 취재 관련 자료의 날자나 숫자를 잘 기억한다는 것이 시간에 쫓기는 기사작성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기억력과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하는 순발력이 중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까지는 학생 때의 여러 기억이 상당히 선명히 남아 있었으며 그때 유행가라 불린 대중가요의 가사도 3절까지 외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일본 통치 말기의 소위 황민화(皇民化) 정책으로 일본 문화나 역사를 주입식으로 강제로 암기시키는 교육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자랑하던 2천6백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왔다는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 124대의 천황 이름을 전부 암기하는 것이 역사공부의 중요 과제였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주입된 어떤 기억은 신기하게도 나중에 사회에 나와 경험한 일의 기억보다도 더 선명하게 머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즉 70년이 넘는 젊은 시절의 기억이 40년밖에 안 되는 경험보다 더 뚜렷하게 머리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최근에 생긴 일들에 대한 뇌의 반응이 점점 신통치 못하게 되어가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체첸’이란 지명을 들었을 때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 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국제 뉴스를 장식한 이 단어가 잠시나마 생소하게 들린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일이 제 주위에서 꽤 자주 일어난다고 새삼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환갑도 안 된 여인이 자기 휴대전화를 한참 찾다가 결국엔 냉장고 속에서 발견하였다는 등의 웃지 못할 이야기는 많습니다.

부주의로 인해 잊음이 흔한 경우는 누구를 막론하고 흔히 보는 현상이지만 개중에는 불면증처럼 병적인 정도로 심한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위 노인의 경우 기억력 감퇴와 건망증이 동시에 찾아 와 괴로움을 받는 이도 있어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매일 먹어야 할 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오늘 약을 먹었는지 아닌지를 기억 못 할 때가 생깁니다. 그래서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날짜를 크게 기입해 환자에게 주는 경우도 있으나 이렇게 해도 약을 거르거나 아니면 하루에 두 번 먹는 노인들이 생깁니다.

제 경우 매일 먹는 약으로 고혈압 치료용이 있고 그밖에 비타민제 등 건강 보조 약품이 대여섯 가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일본 편의점에서 요일별로 칸막이가 된 일주일용 약 케이스를 발견해 집에 있을 때뿐 아니라 여행할 때 편리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이라 별로 많지 않은 행사예정들은 탁상 예정표에 크게 기입해 둡니다. 문제는 이 예정표 자체를 매일 아침 잊지 않고 챙겨야 하는데 그걸 게을리 할 때가 있어 앞에서 말한 결혼식 불참과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글의 제목을 ‘기억력과 건망증’이라 생각해 놓고 며칠 전에 점심 약속이 있어 지하철로 시내로 가는 도중, 이 ‘건망증’이란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속으로 꿍꿍 앓다가 포기하고, 세 시간 후 집으로 돌아와 영어사전으로 ‘forgetfulness'를 찾아 생각해냈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영어단어는 생각나면서도 ’건망증‘이란 우리말 단어는 내 머리에서 한때 자취를 감추어 생각해 내지 못 한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의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거나 평소 많이 쓰는 단어를 갑자기 떠올릴 수 없는 경우 등을 젊은 사람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YouTube에서 잘 듣는 가수가 있는데 가끔가다 그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인터넷 메모지에 이 친구 이름을 아예 따로 기입해 둘 정도입니다. 가끔 하는 글쓰기에 있어서도 평소에 자주 쓰는 우리말이나 영어 낱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고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독거노인의 경우를 빼고 이러한 미묘한 정신적인 변화를 모니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배우자입니다. 그런데 제 경우 현재로서는 아내의 기억력이 전만큼 신통치 않아 걱정입니다. 아내는 이상할 정도로 숫자에 대한 집착이 강해 제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 도중에서도 부정확한 숫자를 들먹이면 참견하는 버릇이 있어 가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총기가 요즘에 와서 많이 수그러지고 기억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보건소에서 하는 치매 예방진단을 저는 거절했는데 아내는 자진해서 받았습니다. 그만큼 자기 몸에 자신을 잃은 것이지요. 오히려 제가 간호해야 할 입장으로 바뀌는 듯합니다. 자신의 기억력을 건강하게 관리한다는 것도 행복의 주요 요인이 된다고 요즘 새삼 생각해 봅니다.

이종완 (211.XXX.XXX.129)

화경춘 선생님
황선생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숩니다. 제가 황선생님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초등학생 때에 일제의 "군진조꾸유"를 외는데 전교에서 첫째를 할 정도로 저의 암기력은 비상했었습니다. 그리고 고동학교 졸업하고 6.25 동란이 일어나 미군 부대 통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금년에 78세인데 기억력이 나빠 학생들의 이름을 외지 못합니다. 다행히 치매 현상은 없으니 감사하지요.
이종완, 연변 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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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8: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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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03.XXX.XXX.90)

이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기억력 떨어지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지요. 같은 세대니
공통점이 많습니다. 항상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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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23: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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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27)

한번에 한가지씩 하는데 익숙해서 아직은 아차...하는것이 드문 편인데,지하철을 타면 가끔 있습니다.
정거장을 아차...하고 지나 칠 때는 다른 생각이 오버 랩되어 그러지요.
어려서는 암기력이 많이 뒤졌는데(손바닥 매맞는 아이) 독서의 분량으로 이해력이 높아지더군요.
성장기에 자주 아파 독서의 분량이 늘어 나면서도 암기력은 향상되지 않더군요.
황선생님께서 워낙 뛰어 나신 것입니다.
저는 설겆이 할때도 설겆이 만 하지 음악을 끔니다.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 만을듣습니다.(여늬 분들은 설겆이 ,음악을 동시에)
집중력을 높여 많이 부족한 암기력을 보완하지요.
그래서인지 대인관계나 일상생활에서 아차...는 드물고 기억력도 보완되네요.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다 보니 이것이 약간의 자폐증이 아닌가? 싶기도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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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4: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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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One at a time.....
아주 좋은 방식인 거 같습니다.
한가지에 집중할 수 있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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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0: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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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03.XXX.XXX.90)

마침 아침 방송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다시 들렀습니다.
참으로 좋은 생활 태도라 생각합니다. 한번에 한가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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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12: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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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03.XXX.XXX.90)

한번에 한가지식 하는 그 치밀성 부럽습니다. 자폐증은 전혀
걱정 안하셔도 좋을듯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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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23: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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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요즘 저의 일상사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선생님께서
조목조목 써주셔서 웃으며 읽었습니다.
저도 몇일 전에 국을 뜰 때 쓰는 국자를 찾느라 집 여기저기
찾아 헤멘 적이 있거든요.
바로 부엌 상판 밑의 물이 담긴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놓구선요.
왜 거기에 넣었는지 알 수 없답니다.

년로해가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 슬프기도 하지만
꼭 나이 탓만이 아니라 여러 충격들을 받으면 또한 그런
뇌의 공동상태가 올 때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건강하신 편이어서 반갑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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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22: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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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차덕희님
답글 반갑습니다.
ㅎㅎ
탄생년의 육십갑자가 돌아오는 때가 멀지 않았으니
연로해가는 현상이라고 보아도 지나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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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0: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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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03.XXX.XXX.90)

공통되는 어려움을 서로 애기하고 위안 받는 것이 우리 글방의 좋은 점
아니겠어요. 자주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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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23: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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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27)

다비님
년로해가는 연령으로 않느껴져요.글의"맛"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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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21: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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