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진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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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진주까지

고영회

2010년 06월 16일 (수) 00:07:17

걸어서 진주까지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사람 쿠르트 파이페 씨가 쓴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란 책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파이페 씨는 64세에 말기 대장암 선고를 받고 화학요법과 방사선 요법을 거부하고 대장 끝부분을 잘라낸 몸으로 독일에서 로마까지 걸어가는 길을 떠납니다. 166일 동안 3300여km를 걸어가면서 일어난 일과 느낌을 적은 글입니다.

몸이 극한의 고생을 거치면서 다시 좋아지는 것도 경이롭게 와 닿았고, 걸어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모질고 나를 해치려는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을 염려해주고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언제가 나도 서울에서 진주까지 걸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담아 뒀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길을 나서기엔 부담이 많았습니다. 진주까지 걷자는 얘기에 공감한 사람이 있어 모두 네 사람이 떠나기로 했습니다. 고향인 진주로 걸어간다는 점도 작용했나 봅니다. 네 사람에게 매‧란‧국‧죽이란 이름을 하나씩 주고, 우리 무리는 사군자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서울에서 진주까지 자동차 길로는 대략 400km이지만 걸어가는 길은 자동차 길의 1.5배 정도는 될 것이고, 더구나 오르고 내려가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걸어야 하는 거리는 600km 이상이 될 것이어서 하루에 평균 30km를 걷는다 하더라도 20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일에 매인 우리들로서는 그런 시간을 한꺼번에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간을 1주일로 줄이고, 주제는 ‘논개의 흔적을 따라서’로 정하고, 금산~무주~장수~남원~구례~화개~하동~남해~삼천포~진주로 가는 길을 가되 도시 사이 이동에는 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길을 나서기 한 달 전부터 주말에 서울 근교를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보는 경치는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저렇게 멀리 보이는 것도 막상 걸어보면 금방 갑니다. 풀, 나무, 강물 가까이에서 냄새와 소리를 느끼면서 보는 경치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길을 가면서 바라보고 느끼는 우리 땅, 우리 강산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 강산을 느끼고 즐기지 못하고 지내온 세월이 아쉽게 다가왔습니다.

첫 걸음은 충남 금산 수통리에서 시작하여 금강 지류를 따라 무주까지 갔습니다. 이 길에서 적벽강을 구경하고 강 옆 길, 강바닥 자갈길을 걸었습니다. 중간에 길이 끊겨 강을 세 번이나 건너야 했습니다. 강을 건널 곳이 있는가, 이 길은 막다른 길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즉시 인터넷 지도정보에 접속하여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정보의 위성사진을 보면 강 옆으로 있는 조그만 길도 확인할 수 있는 때도 있어 물어 물어 길을 가던 선조들 시대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였죠.

우리가 막상 걸으려고 해도 우리에게는 전국 걷기 지도가 없어 아쉽습니다. 각 지자체의 관광 안내책자, 걷기 길을 소개하는 책, 동호인 카페 같은 곳에 간간이 소개되어 있지만 이를 모아 표시한 지도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실제 길을 나서려 하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걷는 길로 연결된 전국 지도를 빨리 만들면 좋겠습니다. 유럽연합에는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걷기 지도가 만들어져 있나 보던데...

길을 걸을 때 막걸리는 영양공급원이자 목을 축이는 음료수였습니다. 요즘 막걸리 바람이 한창인데 지방에서는 서울보다 바람이 약해 보이지만 막걸리 바람은 전국을 감아 돌고 있었습니다. 하동, 진주, 함양에서 마신 막걸리는 단맛이 적고 흔들 때 거품이 거의 나지 않고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저런 막걸리를 서울에서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찾기 어려운 것을 보면 유통과 보관에 문제가 있는 탓인가요?

요즘 걷기 바람이 일기 시작하나 봅니다. 웬만한 지자체에는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에서 한국방송 촬영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기타 연주가 김광석 씨와 같이 걷기길(트레킹)을 소개하기 위해 촬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평사리 들판에 있는 사랑의 나무 그늘 아래 풀밭에서, 명연주가 바로 옆에 앉아 기타 연주를 듣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 걷기가 곧 전국을 휩쓰는 바람으로 자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걷는 길에 생각을 맞춘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예 없지만 찻길 난간 넘어 걷는 길을 만들 수도 있고, 흙먼지가 이는 둑길에는 우리 잔디를 심어 걷기 좋도록 하고, 개울에는 걸어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만들어 주고, 걷는 길이 끊겨 있을 때에는 어떻게 연결시켜 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걷는 길이 더욱 쾌적해지겠지요.

때로는 빠른 걸음으로, 때로는 서산에 해가 넘어가듯 뉘엿뉘엿한 걸음으로 걷다가 시원한 그늘이 나타나면 막걸리 한 잔 마시며 걸어 보십시오. 걸으면 색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걷는 게 참 좋습니다.

고영회 (112.XXX.XXX.252)

서초구 걷기길을 소개한 글이 고영회의 '산소리'에 있습니다. 2019년 05월 24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