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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를 보았다
임철순 2010년 06월 17일 (목) 01:14:43
서울지하철 5호선 종로 3가역의 한 스크린 도어에는 정삼일 시인의 <인생>이라는 시가 씌어 있습니다.

살아생전
조그마한 항아리 속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는
조그마한 항아리
채우지 못하네

이 시를 읽으면서 ‘정말 그러네, 나는 왜 이런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하고 자탄을 했습니다. <인생>이라는 제목은 너무 평범해서 싫지만, 살아 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에 대해 이 시는 아주 알기 쉽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항아리에 담는 것은 근본적으로 보관이나 보존을 위한 일이니 변화하고 활동하는, 살아 있는 몸을 담는 일은 어렵습니다.

고교 졸업 40년을 맞아 6월 10일부터 2박 3일간 동무 40여 명이 버스 두 대로 영ㆍ호남 일대를 다닌 수학여행은 뜻밖에도 항아리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출발 며칠 전에 그 시를 보아서 그런지 인간의 삶과 항아리를 자꾸 함께 생각하게 됐습니다. 40년이라면 긴 세월입니다. 우리 동창들은 어찌 보면 같은 항아리에서 길러진 식물 같기도 하고, 다들 무엇인가 되긴 했지만 40년 전의 모습에서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부르고 다닐 만한 주제가를 한 친구가 미리 제안했습니다. 1957년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에 도미가 부른 영화 주제곡 <청춘 부라보>의 가사를 바꾼 노래입니다. ‘삼베 가다마이 걸쳐 입고 서울 가는 뺑돌이 촌놈아 새끼 네꾸다이 목에다 걸고 짚신 구두 신고서 간다네. 유리 없는 안경에다 사팔눈에다 모기 같은 주둥아리 휘파람 불며 사랑 찾아 꿈을 찾아 희망의 노래 늴리리야 부르며 가잔다. 막걸리도 한 잔 소주도 한 잔 다 같이 잔을 들고 부라보, 부라보~.’ 여행기간에 자주 이 노래를 부르지는 못했지만 사랑 찾아 꿈을 찾아 살아온 40년을 돌이키기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버스의 차창으로 모내기가 돼 있는 논을 보노라니 이제부터 가을걷이 때까지 햇볕에 익고 비바람 견디며 한뎃잠을 자야 하는 어린 모들이 40년 전의 우리 모습 같아 보였습니다. 아직 모내기가 안 된 논은 만만(滿滿)하게 물을 가득 채운 채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런 논의 모습도 그때의 우리처럼 보였습니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변의 풀들은 잠시도 잠잠할 시간이 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을 골라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자연의 바람, 차량의 바람에 늘 흔들리면서 자라고 살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 풀과 사람의 처지가 비슷해 보이고, 심지어 인간은 식물인가 동물인가, 항아리에 담기면 인간도 식물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잠깐씩일 뿐, 여행기간 내내 나는 취해 있었습니다. 뭔가 좋은 말이 생각나 수첩에 끄적거린 것도 지금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고 그때 생각을 되살리기도 어렵습니다. 앉으면 마시고 버스에 타면 노래하고 누우면 천둥처럼 코를 골아 제끼는 바람에 피해를 본 친구들이 많습니다. 사진도 부지기수로 찍었지만 사람들의 머리가 잘리거나 발만 나온 것이 많을 만큼 나는 계속 취해 있었습니다. 말은 멀쩡하게 했는데, 여행기간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명문이 있는 큰 항아리.  
항아리에는 작은 알항아리, 큰항아리, 감항아리(꼭지를 떼어낸 감처럼 아가리가 좁고 팡파짐 하게 생긴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나 봅니다만, 취생몽사하는 나는 술 항아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아리는 원래 아래 위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이니 생김새도 비슷합니다. 옛 선비들에게는 글 항아리가 있었다는데, 나는 그런 것은커녕 똥 항아리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것은 원래 똥을 받아내는 것이지만, 하는 일 없이 지위만 높고 능력이 없는 사람,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데, 마지막 날 갔던 불국사에서 또 항아리를 만났습니다. 그림을 곁들여 회랑에 전시해 놓은 어린이들의 시작품이었습니다. 내준 제목은 <항아리>, <얼굴> 이 두 가지였나 봅니다. 이 중 <항아리> 대상 수상작은 초등학교 5학년생의 작품이었습니다. ‘…오래 저민 시간을 통째로 삼킨 입/불룩한 산등성이 채색된 몸/웅웅거리는 도공의 혼 삼켜버린 음흉한 주둥이/항아리는 자연의 힘으로 요약된 거대한 괴물입니다.’또 하나의 대상 수상작은 ‘…새록새록 숨을 쉬며 동그란 마음으로 항아리는 오늘도 고향을 품에 안는다’로 끝납니다. 이 아이도 5학년이었습니다.

대체 어린이들에게서 무슨 말을 기대하며 항아리라는 시를 쓰게 했을까? 그 아이들은 항아리는 괴물이다, 항아리는 고향이다, 이런 말을 한 셈이지만 나라면 그 나이에 뭐라고 썼을까? 아마도 금상 수상작으로 뽑힌 아이처럼‘된장 같은 소박하고 구수한 마음/고추장 같은 불 같은 마음/내 마음은 작은 항아리 무엇을 담을까?…내 마음은 숨쉬는 항아리/비울 수도 있고 담을 수도 있는/내 마음 항아리’ 정도의 평범한 말이나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항아리는 어린이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주제일 것 같았습니다.

불국사에서 나와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갔을 때, 거대한 항아리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른바 명문대옹(銘文大瓮), ‘명문이 있는 큰 항아리’였는데 목 부분에 十石入瓮(십석입옹), 10석에 해당하는 곡식의 양이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라고 씌어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높이는 1m 50cm, 입지름 60cm인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항아리는 신라시대 도량형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고 합니다.

여행 마지막 날에 그렇게 넉넉하고 큰 항아리를 보게 된 것이 참 고맙고, 이 세상에 그런 항아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스러웠습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에는 예수가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 하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기적을 보였다고 돼 있던데, 항아리는 원래 무엇인가 담아 두면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그릇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도 큰 항아리처럼 그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많은 것을 남들에게 나눠 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2박 3일 동안 항아리를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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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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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란 (211.XXX.XXX.129)
글이 마음에 담기내요. 내 마음에도 조그마한 항아리가 들어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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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5 14:11:16
0 0
임철순 (211.XXX.XXX.129)
그러네요. 비어 있으면 담을 것도 많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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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13:30:02
0 0
두타 (59.XXX.XXX.151)
졸업 40주년 기념 2박 3일 여행.
임酒畢의 행적은 안 봐도 비디오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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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20:31:25
0 0
임철순 (211.XXX.XXX.129)
酒馝로 바꿔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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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10:37:36
0 0
두타 (59.XXX.XXX.151)
예 酒馝님!
술향기.. 그렇군요, 그게 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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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09:38:47
0 0
유수열 (121.XXX.XXX.16)
좋은 뜻있는 여행을 하였군요. 얼마나 즐거웠을까?
우리집에는 고추나무를 심은 세개의 항아리가 있는데 꽃은 수없이 피는데 열매가 여리지 않아 아파트 거실이라 수분이 안되는 것이라 여기고, 부채로 가끔 바람을 보내며 암술과 숫술이 짝지우기가 되도록 바라기만 하는데 .................
부디 담배꽁초가 담기는 항아리 같은 불쌍한 신세는 되지 맙시다.
술은 조금 주리세요. 멋진 인생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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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16:03:07
0 0
채길순 (211.XXX.XXX.129)
저는 어려서 그 안에 얼굴을 넣으면 막연한 두려움과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나는군요, 아이가 죽으면 항아리에 넣어 돌무덤에 버린다는 말을 듣고 나서일 것 같군요. 잘 지내지시요? 항아리에 소리를 넣으면 백 배 천 배의 소리로 되돌아오는 무서운 항아리! 채길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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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4:28:13
0 0
정진홍 (211.XXX.XXX.129)
내주에 모이는 친구들 모임에서 읽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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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17:01:54
0 0
박원규 (121.XXX.XXX.47)
글이 참 쉽습니다. 재미있습니다. 가슴에 잔잔한 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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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09:30:38
0 0
임철순 (121.XXX.XXX.16)
감사합니다. 무슨 글이든 쉽게 쓸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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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9 08:46:3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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