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결승전 기자석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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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결승전 기자석의 빈자리

황경춘

2010년 07월 14일 (수) 00:23:09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으로 한 달 간의 남아공월드컵은 막을 내렸습니다. 요하네스버그 사커 시티 경기장의 현장에서뿐 아니라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온 세계 7억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축구 팬이 이 숨 막히는 열전을 관전했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로 월드컵을 취재하러 온 한 단골 기자가 이 경기의 사흘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주위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로버트 밀워드

AP통신의 노련한 스포츠 기자로서 런던총국 소속인 쉰 여덟의 로버트 밀워드(Robert Millward) 기자가 바로 그 슬픔의 주인공입니다. AP통신에서 근 30년 동안 스포츠경기만을 취재해 온 그는 1986년을 시작으로 4년에 한 번씩 있는 월드컵축구 취재를 위해 금년에는 남아공으로 갔습니다.

7월 7일 케이프타운에서 네덜란드-우루과이 준결승전을 취재한 뒤 결승전 개최지인 요하네스버그에 돌아온 그는 네덜란드-스페인 ruf승전 예상기사까지를 송고하고 숙소인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호텔에서 그의 몸 이상을 발견한 주위 사람이 급히 의사를 불렀으나 그의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공월드컵이 끝나면 그는 곧 귀국하여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리는 역사가 가장 긴 골프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 오픈(British Open)을 취재할 예정이었습니다.

밀워드 기자는 주로 담당하는 축구 경기 외에도 골프, 크리켓, 럭비, 복싱, 경마 등 거의 모든 운동 경기를 다루는 만능 스포츠기자였으며, 올림픽의 하계대회에서는 역도, 동계대회에서는 알파인 스키의 전담기자이기도 했습니다. AP 런던총국의 스포츠 편집인 테리 테일러(Terry Taylor)에 의하면 남아공에 가기 얼마 전에 밀워드 기자 자신의 계산으로 AP에 근무하면서 취재한 굵직한 스포츠 대회나 경기만도 52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사고 하루 전날 런던에 있는 그의 아내는 그와 통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쾌활하고, 웃음이 많고 농담을 잘 했어요. 그는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집으로 올아올 날을 무척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그녀는 그의 직장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과거부터 신문기자의 사망 위험률은 타 직종 종사자에 비해 높게 잡는 것이 생명보험 회사의 관례라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와 언론매체 간의 극심한 현장 취재 경쟁으로 보도관련 종사자의 희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화재나 각종 사고 등의 위험한 현장취재 때문만 아니라 날로 더해가는 민족이나 종교 간의 분쟁으로 이 추세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밀워드 기자가 필자의 옛 직장의 직원이었기에 돌연히 찾아온 그의 불행이 제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떠난 지 오래된 직장이지만 그 인연으로 이런 흐뭇한 일도 있었습니다. 90대 후반의 옛 외국인 동료 한 명과 오랜만에 재회하여 환담을 나눈 일이 최근에 있었었습니다.

현재 서울의 예술의전당에서 미국의 퓰리처(Pulitzer Prize)상을 받은 역대 사진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퓰리처상 사진이라 하면 한국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유명한 AP통신 사진을 빼놓을 수 없지요. 1950년 10월 그때까지 밀리던 UN군이 반격에 나서 평양을 수복한 후 돌연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수많은 평양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기 위하여 반파된 철도교량의 지붕을 앞 다투어 기어오르는 그 사진 말입니다.

이 극적인 사진을 포함한 145점의 귀중한 역사적 작품이 세계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도중에 한국전쟁 60주년을 계기로 두 달 동안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대동강 철교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Max Desfor) 씨는 AP 동경지국에서 사진부장으로 오래 근무했으며 서울에도 취재로 수없이 다녀가 우리와도 친분이 많았습니다.

한국과 연고가 깊은 그 사진이 포함된 전시회니 서울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더니, 본인이 한국전쟁 기념식에 참석한 다음 연락을 해 와 호텔 방에서 반나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10년 전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에는 정부가 초청한 옛 종군기자의 한 사람으로 왔었는데, 이번에는 전시회 주관단체의 초청으로 내한한 거라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엔 30대 중반의 젊은 사진기자로 종군한 데스포 씨는 금년 97세로 아직도 정정해 워싱턴 DC 근처에 거주하며 주간에는 지금도 운전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시내가 너무 번잡하여 운전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크게 웃으며 전쟁의 폐허에서 눈부시게 재건된 서울의 발전은 꿈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물인 투박하고 무거운 구식 스피도그래프(Speedograph) 사진기를 이용해 어렵게 찍은 전쟁 사진 중에서 퓰리처상 수상작품까지 나왔으니, 고달프고 때로는 목숨까지 걸고 일했던 30대의 젊은 종군기자 생활이 지금으로서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고 되돌아보았습니다.

재작년까지는 뉴욕 본사에서 해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은퇴 노기자를 위한 만찬회에 매년 참가했다는 데스포 씨는 집안의 장수 내력 덕분인지 어머니가 101세까지 사셨고 바로 위 누님은 98세로 생존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0년 뒤의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식에도 초청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했습니다.

간단한 이탈리아 음식으로 저녁을 먹으면서도 한없이 계속되는 추억담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아쉬운 작별을 한 것이 두 주일 전의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밀워드 기자 같은 아직 일할 수 있는 기자가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사람의 수명이 결코 젊었을 때 한 일의 ‘포상’(褒賞)일 수는 없지만, 데스포 씨에 비해 밀워드 기자는 정말 나이가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