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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노트를 보면서
임철순 2010년 08월 09일 (월) 00:38:44
2주 전에 글을 쓰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37년 전인 1973년에 쓴 글을 우려먹고 보니 그거 참 편리한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폭염에 새로 글을 쓰느라 낑낑거리지 않아도 되고, 오래 전에 쓴 글을 펼쳐 보이면 생각과 글이 유치하더라도 젊어서 쓴 거라 그러려니 하고 대충 용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말하려고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수법으로 그때 쓴 글을 우려먹기로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지 않는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대로 두었지만, 맞춤법은 당연히 바로잡았습니다.

글을 왜 쓰는가? 쓰고 싶어서 쓸 것이다. 그야말로 쓰지 않고는 참지 못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내면의 필연성이 글을 쓰게 하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병과 고뇌이다. 나는 아직 이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작가란 그의 내면에 침전된 앙금이나 덩어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어서 이를 해소하고자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앓고 있는 정신적인 병과 고뇌를 창작을 통하여 스스로 치유시키는 자이다. D H 로렌스의 말대로 작가는 원고 속에서 그의 병을 치유시키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자기구제ㆍ자기치유를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에게 치유시켜야 할 병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확인하게 되며 병을 치유시키고자 병 속으로 들어가 더욱 더 병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을 한다는 것의 그 부담과 중압감을 나는 견딜 수 없다. 나는 문학을 한다는 기성의 작가나 시인들에게 늘 묻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훌륭한 것입니까? 또, 당신에게는 과연 창작을 한다는 것이 즐거운 일입니까? 아니면 그다지 즐겁지는 않더라도 당신의 천분이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고 또한 창작이란 당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이나 운명을 예감하고 난 후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하는 것입니까?-나에게 있어서는 창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즐겁지가 않은 것이다.
무엇인가를 쓰고자 다가앉을 때부터의 온갖 정신의 긴장과 심리적 압박감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의자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금세 일어설 듯도 하고 아니면 아주 눌러 깊숙이 앉아 버릴 듯도 한 엉거주춤한 앉음새로 나는 어정쩡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나는 거의 창작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완전한 문장을 쓰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 무장한 병사가 채 아직 전장에 닿기도 전에 몸에 온통 둘러메고 휴대한 장비의 무게에 눌려 쓰러지는 경우와 같다. 아직 싸움터에는 제대로 닿지도 않았는데.
캐더린 드링커 보웬(이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가 여자라는 걸 알뿐)의 말에 의하면 작가는 모든 것을 항상 두 번 경험하는데, 한 번은 현실에서 또 한 번은 언제나 그의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거울 속에서 경험하는 2중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2중생활은 2중의 고통이지만 그것은 또한 2중의 보상을 갖는다고 한다.
퍽 고무적인 이 말에서 나는 2중의 보상이라는 것의 진실성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글을 쓰기가 싫다. 글을 쓴다는 것은 되도록이면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를 얻고자 하는 것이리라고 믿는다.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정작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갖고 있다. 글을 쓰고도 싶고, 쓰고 싶지도 않다는 이 모순과, 끝없이 꼬리를 무는 순환은 선후를 알 수 없다.
나는 이제 밤잠을 자지 않고 혼자 깨어 앉아서 끝없이 뭔가를 쓰고 찢고 하는 고독과 답답함보다 밝은 주말이면 교외로 나가기도 하고 운동장으로 가서 야구 구경이라도 하는 데 주력하여 부족감은 느끼는 채로 만족과 화평을 얻어 생활의 밝음에로의 통로를 발견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과연 이런 식으로만 계속 발전하여 문학을 아예 포기해도 애초부터 괜찮은 그런 인간이었던가? 그와 같이 일상적인 밝음을 좇아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그러나 요컨대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에게 왜곡시키는 일이 아니냐? 내면의 진실은 마치 5,000원 지폐의 전면 좌측에 인쇄된 이율곡의 초상처럼 생활을 밝은 불빛에 비춰 보면 여전히 나타나 나를 파뜩파뜩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잊더라도 이율곡의 초상은 늘 거기에 새겨져 있는 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나는 문학을 해도 좋은가? 해서 좋은가?
토마스 만에 의하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공동생활로부터 제외 분리 고립된다는 뜻이다. 예술가란 그의 숙명상 또는 그 자신의 필연과 진실 때문에 자신의 독자적인 생존방식이나 시간ㆍ공간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늘 맞부딪혀 대결해 나가야 하는 것은 고뇌와 고독이며, 고뇌와 고독이어야 한다.
과연 나는 예술가가 될 것인가?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우선 가정을 하자.) 이런 생존방식과 숙명을 받아들여 후회 없을 용의가 충분히 돼 있는가? 나는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닥쳐와서 불시에 내 생활의 질서를 파괴하고 이제까지의 생존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자극(환희 분노 비애)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뜻밖에도 내가 항상 이지적으로 깨어 있길 바란다. 나는 그저 단단해지고 있다. 채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가 어떻게든 아물어 버려서 열매부터 맺으려 하는 수작이다.
새로운 경치와 환경, 인간의 특이한 몸짓에 접하는 나는 늘 나 자신에게 어떤 언어가 치솟아 오르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그와 같은 것들은 한갓 순간적인 스냅사진으로서 내 기억에 존재할 따름이다. 다른 모든 엄살을 빼고 실은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문무왕릉 대왕암, 그 사이에 밀려 들었다 곧 밀려 나가는 바닷물같이 자극은 내게 옹 맺혀 머물지 않는다. 사실상 나는 아무것도 느끼고 싶어 하지를 않는 것이다.
과연 어느 한 문제에만 부대끼어 끝내 잠들지 못하고 다만 뒤척이는 밤이 여전히 내게는 있을 수 있는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이 오랜 습관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울러, 고쳐져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의미를 아직 알 수 없는 여러 事象(사상)들의 연결관계-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할 때 안타깝다. 나는 예술의 온갖 비밀을 알고 싶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니 바꿔 말하면 그 事象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옳을 듯한데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아, 좀 더 언어에 거세게 부딪혀 보고 싶다. 어떤 극적인 해후를 갖거나 작별을 짓고 싶다.

글에 도돌이표가 붙은 듯 상반되는 이야기가 자꾸만 순환 반복되는 이 글은 좌우간 이렇게 겨우 끝이 났습니다. 졸업반인 대학교 4학년 때는 이것저것 생각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문학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은 바로 이런 글의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의 낡은 노트엔 많은 말이 씌어 있습니다. ‘시를 쓰는 인간은 끝내 참아서는 안 된다. 발간 것은 발갛다고 하렴. 손바닥에 비친 석양은 발갛다고 하렴.’, ‘궤도를 수정하고자 레일 위에서 뒤로 멈칫 물러서서 두 갈래로 나뉜 앞길을 바라보는 기차-내가 지금 그 기차다. 그렇게 도사리고 있다.’, ‘이제사 알겠다. 내가 자꾸만 몇 마디 말들을 이렇게 적어 놓는 것은 결국 내가 이제껏 지켜온 나 자신의 어느 부분을 변모시키거나 삭제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어느 부분은 아직 변모하지 않았고, 글을 씀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충실에 내가 여전히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 함이다.’,‘내가 글을 쓰고, 그것을 발표까지 하기 위해서는 나는 대체 나를 몇 번이나 이기고 설득해야 하는 것일까?’….

대부분은 술을 마시고 쓴 말들이지만(왜 말은 꼭 술을 마셔야만 떠오르는 것일까?), 스스로 멋진 아포리즘이라고 착각하거나 나중에 쓸 글의 소재랍시고 적어 놓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그도 있었습니다.‘소화제를 먹으면 소화제가 소화가 안 돼. 방부제를 넣으면 방부제가 썩어. 밥을 먹으려면 배 고파야 되니까 밥을 굶어야 되고, 밥 먹을 기운이 있어야 되니까 밥 먹고 기운 차려서 밥을 먹어야 된다.' 짜식, 꽤 귀엽네! 피식 웃으면서 낡은 노트를 제자리에 다시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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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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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63)
이 글을 읽으며 내내 *장 그르니에의 섬*(김화영 옮김)을 떠 올렸습니다.
문장 전체를 다 이해하긴 너무 난해하지만 읽는 동안 알수 없는 비애와 희열을 함께 느끼게 했던 * 섬* 읽으셨겠지요.제 느낌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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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21: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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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읽겠습니다. 집에 있긴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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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0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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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재 (211.XXX.XXX.129)
오늘따라 님의 글이 철학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그래서 조금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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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13:53:51
1 0
임철순 (211.XXX.XXX.129)
네 맞습니다. 회색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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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0: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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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 (123.XXX.XXX.74)
"소화제를 먹으면 소화가 안돼. 방부제를 넣으면 방부제가 썩어....
관객이 웃을 수 있는 그런 개그가 그 때도 있었군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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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11: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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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218.XXX.XXX.145)
선생님, 혹시 선생님 자신과 너무 깊은 사랑에 빠지신 것 아닌가요? 부디 그러진 마세요.

"소화제를 먹으면 소화제가 소화가 안 돼. 방부제를 넣으면 방부제가 썩어. 밥을 먹으려면 배 고파야 되니까 밥을 굶어야 되고, 밥 먹을 기운이 있어야 되니까 밥 먹고 기운 차려서 밥을 먹어야 된다.에 대해 선생님은 "짜식, 꽤 귀엽네!" 하시지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말이 되는 건 '소화제를 먹으면 소화제가 소화가 안 돼."하는 첫 문장 뿐입니다. "방부제를 넣으면 방부제가 썩어"와 그 다음 문장, 좀 손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방부제를 넣으면 방부제가 썩지 않아"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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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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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방부제가 썩지 않는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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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13: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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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치열한 사유의 글! 그때 글이 더욱 신선하군요.ㅎㅎ
저도 창작(글쓰기)의 본질은 결핍과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 결여된, 갈 수없는 나라이기때문입니다.
그것을 알면서 무겁게 한 걸음 씩 옮깁니다. 망서리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요령꾼 소리(창작의 동인)에 따라 앞으로 나갑니다,북망산으로 떠나가는 '상여' 처럼.
물론 사소한 기쁨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 길가 스러져가는 풀섶에 숨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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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08: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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