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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네 개
임철순 2010년 09월 06일 (월) 01:49:16
안동 농암종택(聾巖宗宅)에서 하루를 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차에 시동을 거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농암 이현보(李賢輔ㆍ1467∼1555)의 종택으로, 집사람과 내가 1박을 한 긍구당(肯構堂)은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받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별당입니다. 그렇게 유서 깊은 한옥에서 상쾌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머무른 시간이 짧은 것을 아쉬워하며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빼는데 핸들이 잘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거 왜 이렇게 뻑뻑하지, 하면서도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출발을 했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차를 집사람과 번갈아 조심조심 몰면서 굽이진 길을 오르고 돌아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군자마을(광산 김씨 마을)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날씨는 몹시 더웠지만 옛 한옥의 멋과 선비들의 풍류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시대가 아니라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양반으로!

그러나 차는 갈수록 무겁고, 커브 길을 돌 때면 다른 차와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점점 더 핸들 회전이 어려워졌습니다. 안동 시내에 들어가면서 자동차 정비업소를 열심히 찾았지만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문을 연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 지도를 보면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섰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라, 점심부터 먹고 보자 하고 한우갈비골목을 찾아가는 길에 안동역 앞의 관광안내소에 들어가 정비업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곳 직원이 둘째 넷째 일요일에 일을 하는 정비업소가 인근에 있다고 알려 주어 찾아갔으나 역시 허탕이었습니다. 그 날은 일을 하는 일요일로 정보가 입력돼 있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문을 닫은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한우갈비골목의 주차장을 찾아 들어가 차를 세워놓고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 받은 뒤, 주차장 직원에게 정비업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음식점에서 고기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 직원으로부터 문 연 정비업소를 찾았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러 군데 전화를 해 보았다는 그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지리를 모르는데 혼자 어떻게 찾아가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동행을 해주겠다고 나선 그가 나를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했습니다. 그 정비업소는 우리가 아침에 지나온 길에 있었고, 제법 규모도 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싶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주차장 직원은 “수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 것 같으면 여기서는 간단히 정비만 하고 서울 가서 제대로 고쳐라”, “정비업소가 손님을 속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니던 곳에 가는 게 좋다”고 코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비업소에 도착해서는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차의 상태를 설명하고 정비 과정을 꼼꼼하게 지켜보아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파워 오일이 다 새어 나간 상태였고, 전에 어느 정비업소에서 그랬는지 억지로 끼워 넣은 호스가 찢어져 있었습니다.

30여분 만에 정비를 마친 뒤 음식점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좋고 안심이 됐습니다. 차를 고치지 못했다면 고속도로에 올랐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주차장 직원은 길을 일부러 우회해서 나를 딱 음식점 앞에 내려주더니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그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주차장에 가서 고마운 그 직원에게 저녁 먹는 데 보태라며 돈을 좀 주었습니다. 한사코 사양하던 그는 마지못한 듯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려 할 때 그와 함께 일하는 여직원이 차를 세우더니 사과가 든 비닐봉지를 답례로 나에게 주었습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았습니다. 푸른 사과 네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속도로에 가기 위해 안동 시내를 지나가는데 비가 그야말로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차를 고치지 못했다면 이 비에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그럴수록 주차장 직원이 고마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비는 거짓말처럼 금방 그쳤습니다. 서울까지 무사히 잘 왔습니다.

나의 작은 배려와 친절이 다른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한 번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사는 게 인간사회입니다. 최근에 만난 신문사 퇴직선배는 10여년 전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내가 신속하게 도와주어 병원에 입원했던 일을 환기시키며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저 “아, 예. 그야 뭐…” 이러고 말았지만, 남을 도와준 사람은 그 일을 곧 잊어 버려도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날 받은 사과는 유난히 맛이 좋았습니다. 1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다 먹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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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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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진격 (211.XXX.XXX.129)
좋은 얘기 한수 듣고 간다.나도 착하게 열심히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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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17:26:46
0 0
홍성원 (211.XXX.XXX.129)
그 사과 참 맛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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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16:27:54
0 0
채길순 (211.XXX.XXX.129)
엔진오일이 다 빠져나가면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그리고 엔진 오일이 다 새면 엔진이 늘어붙어요. 돈 버셨네요. 머문 방이 어떻게 좋았는지 말씀하셨더라면...이제 보니 신문지에 막걸리 돌돌 말아 산행 한 번 같이 하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건강행복하세요. 채길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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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16:27:19
0 0
임철순 (211.XXX.XXX.129)
알고 보니 엔진 오일이 아니라 파워 오일이라고 해서 본문을 스리살짝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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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17:27:29
0 0
김윤옥 (210.XXX.XXX.32)
사람, 人



한가한 오후 지하철 안
행색이 남루한 한 남자가
어떤 여인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었다

여인은 연분홍 손톱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몇 정거장 지나서
여인이 조용히 일어나 나갔다

남자는 잠시 눈을 뜨는 듯 하더니
이번에는 머리를 앞으로 숙인 채
다시 졸기 시작했다

기댈 곳이 없어진 남자가
자꾸만 깨다 다시 잠들곤 했다

옆에 앉은 나는
혹시 그 남자가 내게 기대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물었다
............. 제 어설픈 詩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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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23:25:16
0 0
임철순 (211.XXX.XXX.129)
그렇지요. 사람 인 자는 서로 기댄 모습이지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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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08:39:39
0 0
강혜리 (220.XXX.XXX.183)
형부,
중간까지 읽으면서 제맘대로 짐작했어요. '분명히 형부랑 언니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안 풀고는 그 사실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으이구..'하고.
왜 그랬을까요? ㅎㅎㅎ

어쨌거나 정말 착한 사람을 만나서 참 다행이었네요.
아주 위험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기분좋은 경험이셨네요.
사과 맛있게 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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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22:12:57
0 0
다비 (174.XXX.XXX.138)
저도 강혜리님과 동감입니다.
분명희 싸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ㅎㅎㅎ
두분이 그러고도 남음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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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07:46:42
0 0
임철순 (211.XXX.XXX.129)
에이, 설마 내가(아니, 우리가) 그렇게까지 바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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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08:40:26
0 0
임철순 (211.XXX.XXX.129)
미국의 어느 교수가 신세를 갚으려 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 갚으세요." Pass it on이라고 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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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08:42:43
0 0
김승재l (211.XXX.XXX.129)
주필님 ,!
혹시 그런 생각 안드셨어요? 천사요,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저 아무런 댓가 없이 날 살려주고 홀연히 떠나는 그이는 천사가 아니었을까? 꼭 천사란 표현이 맘에 안드신다면 삼신할마니.....
주변에 그런 천사가 더러 있더라구요.
언젠가 주필님도 누군가의 천사이셨을 테구요......
하늘나라에는 정말로 많은 갖가지 역할을 하는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늘~상 우리 주변을 멤돌고 있는가 봅니다.
오늘 주필님은 또 어떤 천사를 만나셨고 또 어떤 선행으로 천사가 되셨을까요?
1004 ! 끼리끼리 알아보는 , 주필님께서는 분명 누군가의 천사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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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6: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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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 (211.XXX.XXX.129)
기분 좋아지는 사과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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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4: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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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철 (211.XXX.XXX.129)
정치이야기, 강한 자기 주장의 글만 보다가 모처럼 사람사는 이야기를 접하니 너무 좋군요... 이런 이야기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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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3:32:10
0 0
리기태 (116.XXX.XXX.144)
아주 훈훈하고 정겨운 이야기입니다. 글을 통하여 시각적인 시골풍경이 머리에 떠올리니 정말 뜨거운 여름이 아직도 머무는가 봅니다 여러 미사여구보다 간단하고 간결한 칼럼을 통하여 오늘도 하루가 정말 상쾌합니다.
8899234가 사실인가 봅니다.
임철순 주필(酒馝)님 화이팅!
주필님 글 덕분에 기분 정말 좋습니다.
칼럼이 자꾸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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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1: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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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8899234는 9988234가 바뀐 건가요?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죽는 것. 그러면 8899234는 88세까지 99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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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3: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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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o (121.XXX.XXX.155)
세 번째 문단에 접어들면서 '어이구, 초보! 타이어 펑크, 아니면 바람이 너무 많이 빠진거야' 했더니 훨씬 중한 사고였군요. 엔진오일이 다 새어나가면 엔진이 들어붙어 차가 완전히 망가진다던데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친절한 안내에 사과 선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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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0:23:4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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