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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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은 알고 있다’

황경춘

2010년 09월 14일 (화) 00:19:32

부산과 일본 쓰시마(對馬島) 사이의 대한해협에 인접한 험난하기로 유명한 좁은 수로를 일본 이름 ‘겐카이나다’(玄海灘)의 한자음 그대로 ‘현해탄’이라 부릅니다. 이 현해탄이 ‘관부연락선’(關釜連絡船)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 한반도 착취에 따른 수많은 비극의 대명사처럼 쓰일 때가 많습니다.

1905년 을사(乙巳)보호조약에 맞춰 일본 본토 서남단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잇는 정기 뱃길을 개설하여 침략의 도구로 쓴 것이 이 관부연락선입니다. 처음에는 1천5백 톤급의 배를 운행하다가 수요가 늘어나자 곧 3천 톤급의 대형선을 투입하고 대동아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7천 톤이 넘는 호화선까지 등장하여 일반인 외에 군인과 전쟁물자 수송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인 학생이나 상인 외에 숱한 강제동원 노동자와 구직자에 얽힌 민족의 비극이 200km에 못 미치는 이 좁은 뱃길을 오가는 연락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학병으로 끌려갔던 한운사(韓雲史) 이병주(李炳注) 두 작가가 각각 소설 '현해탄은 알고 있다'와 '관부연락선'을 써 널리 읽혀졌고 광복 전에는 가수 장세정이 특유의 가냘픈 목소리로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가 그 애절한 가사와 더불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연합국과의 전쟁이 격화하자 현해탄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은 미군의 잠수함과 어뢰공격 및 무수히 떠다니는 기뢰로 인해 목숨을 건 뱃길이 되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는 1943년 10월 4일 밤에 미군 잠수함이 호화선 ‘곤론마루’(崑崙丸)를 격침하여 6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낸 비극이 있습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긴 일본은 바로 자기네들 내해(內海)라 할 수 있는 이 바닷길을 항해하는 관부연락선을 이 사건 후로는 주로 밤에만 완전한 등화관제를 실시한 채 다니게 하는 궁상에 빠졌습니다.

이런 지옥 길 같이 위험한 바다를 그것도 일본이 패전한 1945년 한 해에 저는 두 번이나 건넜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찔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두 번째는 일본 패전으로 정기 관부연락선 운행이 이미 끊긴 뒤라, 광복의 기쁨으로 온 땅이 흥분에 싸인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조급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칠흑의 밤에 작은 어선을 타고 건넜으니 지금 회상하면 얼마나 위험하고 철없는 처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1945년 4월 하순 당시 용산에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기초훈련을 마친 저는 수십 명의 다른 신병들과 함께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이미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대한해협은 연합군의 계속되는 공중 정찰로 대낮의 해상운 행은 생각할 수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열 번 가까이 이용한 관부연락선이었습니다만 이때처럼 긴장하고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면서 승선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햇살이 아직 남아 있는 시간에 무기 없이 배낭 하나만 메고 승선한 우리는 곧 선창 제일 밑 구석으로 이동했습니다. 유사시에는 꼼짝도 못 할, 입구에서 제일 먼 곳으로 밀려 들어 간 것입니다. 수면 위의 좋은 선실에는 일반 여객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짐짝처럼 무리를 지어 우리가 들어간 3등실에는 다른 부대에서 온 군인들도 많았습니다.

부산항을 떠나 큰 바다로 나오자 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한 전우들이 속출했으나 용산에서 화차 칸 같은 기차로 종일 시달리며 부산으로 온 피로 때문에 저는 어느덧 잠이 들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배는 벌써 시모노세키 항구 가까이 와 있었고 사방은 서서히 동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기 연락선으로 현해탄을 건넌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해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는 귀국할 날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으나 8월 말에 가서야 겨우 수송열차 배정을 받아 동경 북방의 부대로부터 온 하루 걸려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습니다.

산비탈에 있는 초등학교 교실에 우리를 안내한 수송관은 어느 사이 사라지고 각처에서 모인 수백 명의 조선 출신 제대병만이 우왕좌왕하는 혼란 속에 한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우리 그룹 속에서 몇 사람이 이렇게 하대명년(何待明年) 정식 수송선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간 어선을 대절하여 귀국하는 방법을 찾자고 하여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 안 소문에 의하면 벌써 이렇게 해서 떠난 친구들이 많으며 일부는 태풍으로 배가 침몰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원래 소심한 저는 이런 소식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분주히 뛰어다니는 친구 한 사람만 믿고, 매끼 배급되는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초조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닷새쯤 되는 날 그 친구가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와 같이 귀국하자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판단능력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교섭했다는 어부나 어선을 확인도 않고 제대 상여금으로 받은 돈 중에서 30엔을 지불하고 승선 명단에 끼게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하급공무원의 월급이 30엔 내외였다고 기억합니다.

이리하여 9월 상순의 어느 깜깜한 밤에 우리는 지정된 장소에 비밀히 집결하여 대절한 어선을 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100톤도 안되어 보이는 이 작은 배에 몇 명이 승선하였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일념에 들떠 아무 두려움 없이 선원이 안내하는 대로 선창 밑으로 기어 내려갔습니다.

약 4개월 전 몇 천 톤급 연락선을 탔을 때와는 달리, 이 작은 어선에 몸을 맡긴 우리는 큰 바다로 나오자마자 거센 풍랑에 상하좌우로 요동치는 캄캄한 어선 밑바닥에서 배 멀미를 하며 겁에 질려, 잠을 청하는 친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평생 가장 무모한 모험을 저지른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룻밤을 항해하여 뒷날 낮에 눈에 익은 부산 오륙도(五六島)가 저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 ‘아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많은 친구들이 한꺼번에 배 갑판 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선장이 진정하라고 고함을 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지난 주 부산 근처를 스쳐간 태풍으로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福岡) 사이의 초근대적 고속 페리마저 결항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일본 사람은 입춘에서 2백10일째가 되는 9월 초를 ‘니햐쿠토카’(2百10日)라 부르며 전통적인 태풍의 계절로 경계해왔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런 만용을 부렸던 65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미숙 (210.XXX.XXX.196)

생생한 체험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이 부족한 저희들에게는 귀중한 읽을거리입니다. 앞으로도 많이 좋은 칼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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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0: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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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감사합니다. 글 쓸 기운이 남아있는 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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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1: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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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210.XXX.XXX.196)

그런 모험 속에서 살아남으신 황선생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그런 어려운 시대를 지내시고 또 625 동란도 겪으시고 산절수절을 지나셨으니 참으로 하늘이 도우신 삶이었습니다. 저는 625 동란 때 통역으로 미군 부대에 종군학다가 미군의 오발 사고에서 오른 팔에 중상을 입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고 지난 13년 동안 연변 고기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전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니의 은혜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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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0: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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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이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선생이나 저나 비슷한 격동기를 살아온
인생아닙니까. 더우기 이 선생은 큰 부상 까지 입으셨다니 고생이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이때껏 살아왔다는 것만이라도 보상으로 여기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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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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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승 (121.XXX.XXX.2)

대단히 위험한 시기에 현해탄을 건너오신 당시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의 환희와 감격이 대단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어려운 시대의 고통을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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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08: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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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녜 이런 경험을한 선배도 있었다는 것만 후배들이 알아주면
그걸로 만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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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1: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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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36)

무엇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감히 입을 떼기 어렵슴니다.
숙연해짐니다.
54년 생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오리까?.
어머니께서 들려 주셨던 귀동냥이야기,책을 통해 읽은이야기로 황선생님의 글에 댓글 달기조차 송구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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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6: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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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언제나 함께 해주셔 감사합니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말씀들
그게 다 좋은 교후입니다. 오래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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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1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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