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인플레_(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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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인플레

임종건

2010년 09월 28일 (화) 00:40:53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 가운데 가장 대조적인 것이 ‘나(I)'에 대한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나를 지칭할 때 소생(小生)이니 소자(小子) 졸생(拙生)이니 하며 한껏 낮춰야 교양인으로 간주됐습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나, 즉 I는 문장의 첫머리든 중간이든 어디에서 나오든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서양의 이 같은 관행은 고유명사인 모든 사람과 사물의 이름에도 적용됩니다. 인명에 관한 한 지위의 높낮이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I’에 대한 대접과 동격입니다. 우리에게 소문자 대문자 구별이 있었다면 ‘나’는 필시 보이지도 않을 소문자로 표기됐겠지요.

사람을 평가할 때 제도나 지위로 하지 않고 타고난 대로의 능력에 따르는 것이 인본주의라고 한다면 ‘나’를 중시하고 ‘이름 석 자’를 중시하는 서양의 호칭 관행은 그 점에서 더 인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직함보다는 미스터나 미시즈 아무개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는 성명 또는 성 뒤에 직함, 그 뒤에 ‘님’을 붙여 부릅니다. ‘홍길동 사장님’이거나 ‘홍 사장님’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장님’하고 불러도 결례는 아니지만 ‘사장님’을 빼고 이름에다 우리말의 미스터, 미시즈에 해당되는 ‘씨’ 또는 ‘님’을 붙여 불렀다간 큰 코를 다치게 됩니다. 한국인의 호칭에서 지위는 절대적인 겁니다. 한국인의 삶이 지위쟁탈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직함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족 간의 호칭도 우리만큼 세분화돼 있는 나라도 드뭅니다. 직계 따로, 방계 따로 입니다. 할아버지도 증조 고조가 있고, 고모 이모도 촌수에 따라 호칭이 다릅니다.

서양에서는 가족의 호칭은 할아버지에서 손자와 조카(Nephew Niece)까지이고, 그 이상은 아저씨(Uncle) 아주머니(Aunt)로 통합니다. 며느리(Daughter-in-Law) 사위(Son-in-Law),장인(Father-in-Law) 장모(Mother-in-Law)도 사전상의 이름이지 호칭은 아닙니다. 외국인 사위나 며느리로부터 ‘미스터 아무개’ 또는 ‘You'라고 불리워도 놀랄 게 없는 겁니다.

미국의 언론들이 오바마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를 살펴봅니다. 처음 한번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President Barack Obama)이라고 씁니다. 그 다음부턴 ‘미스터 오바마’ 아니면 그냥 '오바마' 그리고 대부분은 ‘그(He)’라는 3인칭 대명사로 쓰더군요. 미국사회에서 대통령에게 붙이는 ‘미스터’는 '각하'로 통칭되기는 합니다.

우리 언론의 대통령 호칭관행은 어떤가요. 문장 처음에는 서양에서처럼 성명에 공직명을 붙여서 씁니다. ‘아무개 대통령’이 됩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성에다 매번 대통령을 붙여 ‘이’ 또는 ‘김’ 대통령으로 부르는 겁니다. 더러 ‘MB’ ‘DJ' 등의 영어 약칭도 등장하지만 ‘그’라고 쓰는 언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표현은 불경으로 간주됩니다.

노무현 김대중 전직 대통령의 별세 때 언론들은 특집을 냈습니다. 신문의 경우 20페이지에 가까운 대형특집, 방송은 종일 생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도 언론들의 두 분에 대한 호칭은 주어로 쓸 때마다 ‘고 아무개 전 대통령’이라고 썼습니다. 어느 신문 방송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로 대체했을 경우 띄어쓰기를 포함해 10자 정도를 줄일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족히 한 페이지 정도의 지면을 절약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언론 기관의 전직 또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이런 호칭표기를 연간 단위로 계산한다면 신문의 지면 낭비와 방송의 시간낭비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그(He)’라고 쓸 수 있는 신문은 영자지뿐 입니다. 그것은 영자지가 대담해서가 아니라 영어의 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자지들이 한글매체들처럼 대통령을 반복해서 ‘President So and So'라고 표기한다면 외국 언론들로부터 ‘요령부득’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더 웃기는 호칭도 있습니다. 엄연히 현직 국회의원인데 전직으로 호칭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표를 지낸 국회의원을 ‘아무개 전 대표’로 부르는 관행 말입니다. 박근혜 의원은 ‘전 대표’가 공식직함처럼 됐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불경으로 간주되는 마당에 ‘그녀(She)’ ‘박근혜 씨’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다양한 직함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사람 가운데 가장 화려했다고 간주되는 직위를 남들이 알아서 불러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직을 갖고 있다면 현직 호칭이 자연스런 게 아닐까요. ‘의원’보다 ‘전 대표’가 커 보이기 때문이라면 어딘지 작아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36년을 신문기자로 살았습니다. 만년에 사장과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달아보기도 했습니다만 내가 느끼기에 가장 정겨운 호칭은 요즘도 조카들이 부르는 ‘기자 삼촌’입니다.

지위보다는 이름 석 자, 즉 인간 본연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호칭문화에 대해 우리도 한번 생각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3인칭 대명사를 보편화함으로써 호칭의 인플레를 시정하는 것은 그런 풍조를 만들어 내는 데 상당한 책임이 있는 언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