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라 포자? 노 포자!
신아연 2010년 09월 30일 (목) 00:09:55
남편과 제가 꾸리는 레스토랑 이름은 '라 포자(la pausa)'입니다. 혹자는 '라 파우자'라고 발음하지만 어떻게 읽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말인 'pausa'는 영어의 'pause' 'break'를 뜻합니다. 바쁜 일상 중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휴식하는 시간과 공간을 우리 가게가 마련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입니다.

광고 문안대로 깔끔한 음식과 세심하게 선별된 음악,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가 상호와 걸맞은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말마따나 제대로 된 'pausa'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에 '컨셉이 맞아 떨어졌다'는 자부심이 듭니다.

하지만 '홀과 키친'의 간극은 남과 북, 동과 서의 그것으로 비유한다 해도 모자랄 만큼 도무지 설명할 길도, 채울 길도 없습니다. 음식이 나올 동안 와인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손님들 저편의 주방 쪽은 주문표에 명시된 다양한 선제공격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전쟁을 치릅니다.

대여섯 개의 프라이팬을 동시에 돌리면서 애피타이저나 샐러드가 제대로 나가고 있는지도 챙겨야 하는 헤드 셰프는 앞 뒤 불판을 넘나드느라 너울대는 불꽃에 손과 손목을 데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오븐에 넣어둔 빵이 깜빡하는 사이에 타버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구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실수하기 무섭게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의 채근을 전하는 웨이터들의 울상과 마주쳐야 하고 자칫 주문이 엉켜 도미노 현상이 생기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그 와중에 일을 배운다는 빌미로 주방의 한 귀퉁이를 맡고 있는 저로서는 매번 찾아드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물 위의 우아한 백조와 그 백조의 처절하다 못해 경박하기조차 한 물밑 발길질을 연상케 하는 홀과 키친의 대조적 상황 속에서 아뿔싸, 저는 그만 '백조의 몸통'이 아닌 '백조의 물갈퀴'를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이 지경이니 남들에게 '라 포자'를 주느라 저와 남편은 완전 '노(no) 포자' 상태입니다. 밥장사를 시작한 이후 밥을 굶는 것은 다반사이고 오밤중에 집에 돌아오면 신 벗는 자리가 곧 옷 벗는 자리요, 가방 놓는 자리라면 말 다한 것 아닌가요.

하지만 젊지도 않은 나이에 비유가 아닌, 실제로 돈을 주고 고생을 사서 하는 고달프기 짝이 없는 나날 중에 어느 결에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여정이자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경부선은 옳고 호남선은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행로를 택하든 '가지 않은 길'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보따리는 풍성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이 행로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렇다 할 공감대를 갖지 못했을 한 부부를 여정의 출발 지점에서부터 만났습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아직은 낯선 길에 서 있는 저와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행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예측 가능하고 만만했던 환경을 버리자 치열함과 긴장 속에서 새로운 만남이 찾아왔으니 여정의 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불과 두 달 남짓한 동안 이 길을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평생 만나지도, 만날 필요도, 만나서도 안 될 사람들과의 스침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여정의 일부분이자 징검다리라고 자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 한 자, 책 한 줄 대신 꿈에서조차 메뉴판만 들여다 보는 요즘, '이러고도 나 글쟁이 맞아?' 하고 스스로 좀 놀랄 때가 있지만 인생 60쯤에는 어차피 이력서를 새로 쓰게 될 것 같아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글쟁이에서 요리사로 제대로 변신하는 때 쯤에는 제게도 '라포자'가 찾아오겠지요.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신아연 (110.XXX.XXX.142)
제가 밥을 파느라 격려를 해 주신 분들께 일일이 감사의 마음을 전할 겨를이 없네요.^^ 실은 먹고 살자고 시작한 일이 좀 힘들게 가고 있을 뿐인데 이렇게 응원의 박수들을 보내주시니 가다가 그만 두면 아니간만 못할 것 같습니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겠습니까만, 요즘 저는 나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랍니다.^^
답변달기
2010-10-05 22:30:01
0 0
김명임 (115.XXX.XXX.83)
새로 선택한 긴 여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아직은 스스로 '노 포자'라 명명하지만 조만간 아연님에게도
'라 포자'가 되리라 믿습니다.
항상 화이팅하시고 '라 포자'를 통해 만나는 새로운 인연들과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여정을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60에 쓰실 새로운 이력서도 기대해봅니다.
답변달기
2010-10-05 10:50:36
0 0
임영철 (110.XXX.XXX.249)
멋진 여정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힘드시겠지만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참 와닿네요. 즐거운 나날 되세요.
답변달기
2010-10-02 11:33:45
0 0
홍승철 (110.XXX.XXX.249)
그렇죠. 쉼 없는 여정이자 과정이죠. 공감합니다. 저도 얼마 전 난생 처음인 세네갈에서 새 일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일은 흥분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답변달기
2010-10-02 11:33:14
0 0
김윤옥 (210.XXX.XXX.135)
아들아이 직장 부근의 칼국수 전문집의 칼국수 맛이 기가막히답니다. 그 가게가 세든 건물이 리모델링을 끝내고 다시 문을 열었던 날 찾아갔더니 가게를 쉬는 동안 부부가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세계일주를 했다고 하더랍니다. 하고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 해서 하고 멋진 쉼을 즐긴 그 부부를 아연님 부부로 착각해도 되겠습니까?
답변달기
2010-10-01 16:04:50
0 0
marius (220.XXX.XXX.142)
작명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직업이 하나 더 추가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은 그 집에 가보고 싶은데 음식도 먹고 싶은데 바다 건너 비행기를 타야 하니 안타갑습니다. 글 쓰시는 솜씨로 음식을 만드시는 것이 분명하니 그 맛이 또한 얼마나 정갈할까 싶습니다. 계획대로 순조롭게잘 진행이 되어서 점점 더 글 쓰시는 시간이 늘어갔으면 싶습니다. 왜냐하면 부엌 일 하시고는 이번 글이 더 감명 깊기 때문입니다.
답변달기
2010-10-01 08:28:17
0 0
utopco (123.XXX.XXX.70)
무슨 글을 써야하나 고민할 필요없이 저절로 써지는 글입니다.
그래서 명심보감에 "不經一事 不長一智"라 했습니다.
한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가지 지혜를 키울수 없다.
저도 긴 시간의 호화로웠던 생활무대에서 내려와 지금은 아마 신 아연씨와 비슷한 심정으로
자칫 무상하게 보냈을 새로운 시간을 만나며 삶의 진가를 알아가는
소중한 경험들을 하며
그 다른 것들이 더 삶을 공감하게 해 주겠지요.
생생한 변화의 공감을 많이 써 주시길......
답변달기
2010-09-30 11:32:14
0 0
Like sun (211.XXX.XXX.146)
'라 포자'! 이름도 좋네요. 그런데 너무 멀어서 가볼 수 없는 것이 아쉽네요. 이왕 시작하였으니 크게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메일에 표시되는 필자 소개난을 수정해야 겠군요.
답변달기
2010-09-30 09:36:45
0 0
차덕희 (121.XXX.XXX.123)
아연씨,화이팅!.
식당업이 중노동에 가깝지만 복받을 수 있는 업종이지요.
다양한 직업에는 어두운 업종도 수두룩 한데 (목구멍이 포도청임),양지의 업종이예요.
양지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시길 기원함니다.
아연씨의 씩씩하고 낙천적인 성품이 많이 도움이 될듯 함니다.
답변달기
2010-09-30 09:10:30
0 0
인내천 (112.XXX.XXX.244)
보세요!
얼마나 싱싱한 칼럼입니까!
정치인이든 글쓰는 분이든 현장을 주시하고 몸담는 사람은 절대로 틀린 길을 가지 않는답니다. 이 원칙은 민주화운동가나 사회운동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랍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 백조의 물갈퀴에 처하지 못했던 사람은 정치도 글도 제대로 할 수 없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연씨의 글은 앞으로 더욱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홧팅!!
답변달기
2010-09-30 08:22:42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