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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일수록 겸손하게
임철순 2010년 10월 04일 (월) 01:15:10
최근 어느 구청의 소식지를 우연히 읽게 됐습니다. 타블로이드판 16쪽짜리 소식지는 지질도 좋고 편집과 색조가 깔끔ㆍ차분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어느 기관 어느 회사의 소식지든 사보(또는 사외보)든 요즘 나오는 인쇄물은 우중충하거나 칙칙한 게 거의 없이 아주 세련돼 있습니다.

1면에 실린 기사는 구청장이 ‘2010 매니페스토 약속대상’선거공약서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뉴스였습니다. 그야말로 대문짝 만하게 수상 사진을 싣고. 그 아래에 다른 면의 기사들보다 훨씬 큰 글씨로 된 기사와 매니페스토에 관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다른 기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6ㆍ2 지방선거 후보자들 중 당선자 260명을 대상으로 예비후보자 공약집ㆍ선거공약서의 창의성 내용성 형식성등 3개 항목을 평가해 수상자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소식지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매니페스토란 ‘선거기간에 유권자와 한 약속, 목표와 이행 가능성, 예산 확보의 근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공약’을 말하는 것으로, 유권자인 주민과의 신뢰 형성을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미국 일본등 선진국에서 정착된 제도입니다.

그런 상을 받았으니 자랑스럽기도 하겠구나, 하면서 다른 면을 펼치니 ‘우리 구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느냐’는 주민 대상 설문조사 결과가 5쪽에 걸쳐 실려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특집 기획을 한 셈입니다. 이게 당연히 1면 톱이지 어떻게 구청장 수상기사가 1면 톱일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 특집도 설문조사에 참여했던 구민들과 구청장의 대화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어쨌든 구청장 수상기사보다는 더 중요한 게 분명합니다.

더 우스운 것은 그 구청장만 이 상을 받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이렇게 구분된 직위별 시상내역에서 대상 수상자만 살펴보면 시ㆍ도지사는 3명, 교육감 1명, 구ㆍ시ㆍ군의 장에서는 9명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서울의 구청장 중에서도 4명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구청장들도 자기만 대상을 받은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내가 본 소식지처럼 다른 구청에서도 소식지 1면을 구청장 수상기사로 떡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도차야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소식지는 구 소식지가 아니라 구청장 소식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청장님이 큰 상을 받았으니 구청 공무원들은 이를 알리느라 난리가 났을 게 뻔합니다. 평소보다 소식지를 더 많이 찍어 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은 되도록이면 아랫사람들에게 비굴한 아부와 과잉충성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며, 과잉홍보를 스스로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니페스토 대상을 받은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소식지의 안쪽에 적절하게 보도하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너무 크게 내지 말라”고 아랫사람들에게 편집방침을 주지시키면 더 멋지지 않겠습니까? 구청장은 소식지의 발행인입니다.

그런데, 다들 그럴 의사가 별로 없는 게 문제입니다. 요즘 지자체장들은 사실 국회의원들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권한도 막강합니다. 그 지역에서는 왕이나 마찬가지이니 겸손을 잘 모릅니다. 모든 행정행위는 차기를 의식한 선거운동과 다름없습니다. 평소 문화예술에 그다지 관심도 없던 어떤 구청장은 예술 좋은 건 알아가지고 관내 공연장에서 성대하고 화려하게 취임식을 한 뒤, 예술에 엄청 관심이 높은 단체장인 양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직자들은 대체로 겸손과 공개념을 잘 모릅니다.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가용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공단(公團)의 이사장은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항공기의 1등석을 고집하는 바람에 공단이 아예 여비 지급 처리지침을 바꿔준 사실이 최근 밝혀졌습니다. 포럼을 개최하는 미국의 은행이 비즈니스석을 제공했는데도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했는지 돈 더 내고 1등석을 탈 수 있게 규정을 고쳤다고 합니다. 하찮은 사례 같지만 남의 돈, 국민의 돈이 무서운 걸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어느 날 구두를 닦고 있는 걸 보고 놀란 비서가 “왜 직접 구두를 닦으시느냐”며 말리자 링컨은“그럼 나는 누구 구두를 닦아야 되지?”하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늘 자기 구두를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닦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줄 필요는 있지요. 그런 자세를 갖춰야 아랫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윗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극성스럽게 과잉홍보를 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공직자는 주민들이 다 알아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앞세울수록 훌륭한 업적과 인품이 더 빛이 날 것입니다. 囊中之錐(낭중지추)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조직에서든 윗사람이 솔선수범을 하면서 매사를 공개념에 맞게 처리한다면 그 조직은 금세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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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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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 (121.XXX.XXX.109)
신문사에서 글 쓰는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 혹시 주필 아닌가요?

그런데.. 임주필님은 지나치게 겸손하신 편은 아닌감유?

ㅎㅎ 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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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8 10:43:13
0 0
김휘동 (121.XXX.XXX.16)
겸손이 제일의 덕인데 요즈음 그런 사람 찾기가 어려운게 맞지요. 지난 세상은 어땠나요? 앞으로의 새상은 어떨까요? 겸손은 아마 하느님이 인간에게 제일 적게 준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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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23:39:57
0 0
용백 (222.XXX.XXX.100)
낮출수록 높아지고, 높일수록 낮아지는게 순리겠지요. 움켜 쥘수록 적어지고, 버릴수록 더 많은 것이 솟아나기도 하고... 참 쉬운데, 왜 그걸 못들 하시는지... 물론,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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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4 17: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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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96)
진정한 자존심은 스스로 돌아보기에 부끄럽지않은 것일텐데 남 앞에 번듯하게 보이는 속빈 껍데기를 자존심으로 오해하는 것같습니다. 내공이 탄탄하다면 스스로 겸손 할 수 있을텐데 직함으로 스스로를 높여보려는 허영이 부끄러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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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4 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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