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회관의 영어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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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관의 영어 간판

허영섭

2010년 10월 05일 (화) 01:48:26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서울역사박물관 조금 못 미쳐서 구세군빌딩 뒤쪽으로 한글회관이 눈에 띕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아담한 건물인데, 이름 그대로 한글학회가 들어 있는 회관입니다. 이를테면,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총본산인 셈이지요. 지난날 구세군빌딩 외에는 주변에 큰 건물이 거의 없었기에 큰길에서도 잘 보였으나 지금은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옥과 새문안교회 교육관 같은 건물로 둘러싸인 데다 바로 옆에 오만 대사관까지 새로 지어지고 있어 상당히 왜소해진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그것보다 한글회관을 더욱 볼품없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안타깝고 민망스런 얘기지만, 회관 건물 1층의 바깥 유리창에 붙어 있는 영어 글씨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 알파벳 표기도 있고 영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도 있습니다. 한글회관에 입주한 골프용품 판매업체의 이름과 업종을 간판삼아 유리창에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영어와 한글을 섞어 표기한 팻말이 회관 앞에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한글론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글회관은 그 위신과 체면을 손상하지 않도록 건물 간판에 있어서도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한글회관에 영어 글씨가 나붙어 있는 것은 청와대나 정부중앙청사에 별다른 이유없이 다른 나라 국기를 꽂아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팻말의 임자인 골프용품업체 측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한글회관과의 정당한 계약에 따라 창문에 영어 글씨를 써붙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글회관 측의 생각이 짧았던 탓이라고 여겨집니다. 번연히 그렇게 될 줄 알고도 영어 간판을 쓰는 회사와 사무실 계약을 맺은 것일 터이니 말입니다. 물론 복잡한 속사정이 없지 않겠으나 한글회관이 스스로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영어몰입 교육까지 시키려는 글로벌 시대에 제가 공연히 타박을 늘어놓는다고 나무라는 분도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우리 생활에서 영어뿐만 아니라 온갖 외래어가 습관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에 있어 SAMSUNG, HYUNDAI라는 영문 로고가 눈에 익숙해진 데다 다른 기업들도 LG, SK, CJ, POSCO, KB금융, KT&G 라는 식으로 영문자 이름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한글회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 사옥도 현관에 KUMHO ASIANA FIRST TOWER라는 영어 글씨를 커다랗게 붙여 놓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어나 외래어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해서 한글회관의 영어 간판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한글회관의 주체인 한글학회는 그것을 감시하고 우리 말글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본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글학회가 일제 식민치하의 혹독한 탄압을 견디며 외곬스럽게 우리 말글을 지켜 왔다는 점에서 회관에 외국어 간판이 나붙는 것은 선열들의 유지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입니다. 일제는 삼천리 강토뿐만 아니라 우리 말글도 빼앗으려 들었지만 선열들께서는 온몸으로 그것을 지켜 왔습니다.

한글학회의 뿌리인 조선어학회는 한글 보급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했으며,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벌였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바로 조선어학회였습니다. 그 결과 1942년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이병기 김법린 이은상 정인섭 선생 등 서른세 분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그 가운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한글회관을 짓도록 사재를 털어 내놓았던 이인 선생(초대 법무장관)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었던 분이 아닙니까.

한글회관의 유리창 글씨가 일본의 히라카나가 아니라고 해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닙니다. 영어 알파벳이 용인된다면 한자를 거부할 명분이 어디 있으며, 일본 글자를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마침 요즘 한글회관에는 새로 복원된 광화문의 한자 현판과 관련해 “세종대왕 등 뒤에 한자 현판 웬말이냐”는 성토 플래카드가 붙어 있어 창문의 영문자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해 공식 문자로 삼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대표들이 한글회관을 방문해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며칠 뒤에 또다시 한글날을 맞습니다. 올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때(1446년)로부터 564돌이 됩니다.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에 커다랗게 내걸린 ‘한글, 세상과 어울림’이라는 플래카드가 그 앞의 세종대왕 동상과 어우러져 보기에도 매우 편안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과 그것을 지키고 가꿔온 선열들의 뜨거운 의지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dngchon (122.XXX.XXX.243)

허영섭 선생님이 지적하신 한글회관 영어간판 잘 읽었습니다. 학히에 관심을 가져주신 선생님께 고마운 말씀을올리면서 송구스러운 마음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학회의 어려운 사정으로 그 당시 임대사정이 좋지않아 골프 판매점과 계약을 맺은것이 원인이되어 그 이후 간판 문제로 여러차례 업주와 상의를 하였지만 영업상 문제로 쉽게 해결이 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거듭 송구스러운 말씀을 올리오며, 이 일에 대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한글학회 사무국장 유 운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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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17: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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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04)

한글학회 앞을 자주 지나면서 학회의 입지가 좁아진 듯 느끼면서 안타까움을 가졌지요.
고령자들을 위한 "맞춤법 교실"같은 반도 필요한데...라며 생각하며 지나가곤 햇습니다.
담당자의 성의있는 답변이 산뜻한 느낌을 주네요.
학회의 발전을 기원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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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0: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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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12.XXX.XXX.244)

근본을 망각한 처신 같습니다
적어도 한글회관 건물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외래어가 표기 되어서는 안되고 간판도 부착 되어서는 안됩니다. 쉽게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어휘가 풍부한 세계 최고의 언어 한글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천지에 영자 표시가 범람해 여기가 미국의 어느 귀퉁인가 착각이 드는데 한글회관에까지 영자를 표기한다는 것은 주체성을 상실한 망발입니다. 당장이라도 깨끗이 지우고 한글로 바꿀 것을 엄중히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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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10: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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