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안진의 마음결
     
가을 운동회
안진의 2010년 10월 19일 (화) 00:17:51
맑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작년에는 학교 건물의 재건축공사로 올림픽 공원의 한 체육관을 빌려서 했는데, 올해는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만국기를 걸고 개선문도 만든 교정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운동회의 백미는 달리기입니다. 달리기 출발선에 세 명의 여학생들이 서 있는데, 제 딸아이만 쇼트트랙 스케이트 선수를 닮은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달릴 법한, 의욕이 앞서는 자세라 웃음보를 터뜨리게 합니다.

그런데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아이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뜁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전력질주를 해야 하는데 노래를 부르니 구경하는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기도 합니다. 어찌나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는지 기합을 불어 넣는 거라는 추측들도 내었습니다.

“달리는 것에 온 힘을 모아서 열심히 뛰어야지. 노래는 왜 불렀어?” 엄마의 질문에 아이는 대답합니다. “흥겹게 즐기면서 달리는 거야.” 아이에게 달리기의 등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학년 별 색색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청·백기를 들며 응원전을 펼칩니다. 그런데 응원 가운데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청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백군 우! 백군 우!” 하는 응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서 ‘우’라는 것은 야유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상대에 대한 야유 섞인 응원을 들으니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기억해 보면 우리 편 “이겨라!”, 상대 편 “져라!”는 저의 유년시절 운동회에서도 들었던 익숙한 구호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청군(靑軍)과 백군(白軍)의 ‘군’이 ‘군사’ 혹은 ‘군인’을 이야기함과 상통합니다.

청군·백군으로 나누어진 운동회가 ‘국민학교’라는 국민을 기르는 곳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의 신체를 만들기 위한 내용을 담아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운동회를 통해 무예의 기술을 연마하기도 하였고, 기마전을 했으며, 매스게임(mass game)을 통해 조직력을 갖추기도 하였습니다. 운동회는 철저한 경합의 방식이고 승부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운동회는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라 동네의 잔치였고 커뮤니티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청군과 백군이라는 집단으로 양분하고,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협동보다는 경쟁의식을 고취했다면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운동회는 딸아이가 노래를 부르며 달렸던 기분처럼, 승부를 떠나 흥겹게 즐기는 행사여야 합니다. 우리 팀도 칭찬하고 상대 팀도 격려하는 응원전이 펼쳐져야 합니다. 상대도 잘하고 나도 잘하는 창조적 놀이문화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서, 문방구, 분식집 등 지역사회 모두가 함께 참여하며, 서로의 물질과 재능을 기부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쿨존(school zone)을 중심으로 차 없는 날을 만들고, 이웃과 따뜻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날만큼은 아이들이 즐겁고 안전한 놀이공간에서 맘껏 뛰놀게 해주는 것이지요.

내년 운동회에는 우리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저를 웃게 해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경쟁을 부축이거나 관망하는 운동회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모두 함께 나누고 즐기는 진정한 축제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인내천 (112.XXX.XXX.244)
제안에 적극 동의합니다.
자연스레 농촌지역에서는 초등학교운동회가 지역운동회와 지역축제로 바뀌고 있답니다. 선진적 생각에 의한 기획에서 이뤄진게 아니라 학생 숫자라고 해봐야 고작 100여명 내외에 불과해 학부모와 지역민들이 함께하지 않음 운동회 자체가 열릴 수 없는 조건 때문입니다. 저희 지역의 3개 초등학교를 하나로 통합한 숫자가 그정도니까요.
아스라이 먼 옛날 천여명이 다 된 학생들이 흙먼지 뿌연 운동장에서 청백으로 나뉘어 혼신을 다해 뛰고 즐기던 그날이 어젠듯 선명합니다!
승부와 경쟁이 아닌 축제같은 운동회가 줄줄이 열리는 올 가을이었음 좋겠습니다~~
답변달기
2010-10-19 10:40:1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