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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고(訃告)
고영회 2010년 10월 28일 (목) 00:57:10
어렸을 때 먼 동네에서 누런 봉투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이 가끔 있었습니다. 봉투를 받은 아버지는 속을 꺼내보곤 대문 옆에 달린 새끼줄에 끼워 뒀습니다. 그 새끼줄에는 색 바랜 봉투가 여러 개 꽂혀 있었습니다. 부고장을 담은 봉투였습니다. 가끔 아버지 곁에서 종이에 적힌 내용을 곁눈질해 보지만 새까맣게 한자로 적힌 글자만 들어올 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보면 "누가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려 주셨습니다. 1960~70년대에 시골동네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그런 부고를 읽고 누가 돌아갔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심스럽습니다.

가끔 신문에 실린 부고를 봅니다. 며칠 전에도 신문 광고란에 세로로 ‘訃告: ○○大人慶州○公○○께서二0一0年十月00日午前別世하셨기에삼가알려드립니다’에 이어 殯所, 永訣日時, 葬地를 알리고, 未亡人, 嗣子, 女, 子婦, 壻, 孫, 外孫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한자를 배웠고, 이런 부고에 익숙한 분이야 무슨 내용인지 알겠죠. 그렇지만 한자를 배우지 않았고, 배웠더라도 위 글자를 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한자 공부를 한 뒤에도 부고에 나오는 글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부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부고는 대부분 한자로 적히는데, 일상 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아 읽기 어렵고 뜻도 알 수 없는 한자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띄어쓰기도 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게 적는 것 같습니다. 부고를 볼 때마다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부고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라고 풀이합니다. 사람이 죽었으니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죽음과 장례일정을 알리기 위한 글입니다. 부고를 보고 그런 내용을 알 수 있어야 부고로서 뜻이 있습니다.

부고를 저렇게 적으면 누가 죽었는지, 유족이 누군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부고의 목적으로 보면 헛일한 셈입니다. 더구나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은 부고를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을 실컷 들여 광고했지만 광고효과는 별로 없는 셈이지요. 그래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알리는 글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는 게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별세 알림: 경주○씨 ○○○(○○대인)께서 2010년 10월 00일 오전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 드립니다’에 이어 빈소, 영결일시, 장지를 알리고, 유족란에는 부인,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외손자의 이름을 차례로 적으면 부고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玆以告訃’하던 것을 이제는 ‘삼가 알려 드립니다.’라고 하니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것인가요?

변리사는 국제교류행사를 자주 합니다. 외국변리사회와 국제교류행사를 할 때 길거리에서나 신문, 책 같은 데에서 영어나 한자가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네들이 ‘너희 글자 두고 남의 글자 쓰냐?’ 하며 쳐다보는 것 같아 속이 참 불편합니다. 그들이 거리에 한자 간판이 생각보다 적다고 얘기할 때는 다행이다 싶고요.

우리말과 우리글을 쓴다는 것은 나다움, 우리다움, 한국다움을 유지하는 바탕입니다. 나는 나다움을, 우리는 우리다움을, 우리나라는 한국다움을 지켜갈 때 나, 우리, 우리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나답지 않은 것, 우리답지 않은 것, 한국답지 않은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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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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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윤 (119.XXX.XXX.227)
좋은 지적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많은 비용에도 효과는 시대가 변했는 데 적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말미에 야생초사랑은 어떻게 첨부되었나요. 자발적입니까 아니면 비자발적입니까 궁금해요.
고재윤 환경공단 전문위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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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0 08: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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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220.XXX.XXX.62)
한문을 얼마나 아느냐가 지식의 척도로 여기던 시절의 부고 형식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신세대들은 이런 부고 앞에서 까막눈일수 밖에요~
한글로 된 부고가 상용화 됐음 좋겠습니다.
제발 거리의 간판들 작아지고,영어나 한문 쓰지 말고,품위 있는 한글간판으로 바꿔졌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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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08: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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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119.XXX.XXX.227)
한글로 얼마든지 품위있게 달 수 있죠.
우리 글을 제대로 알려고 최소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한글을 내리깎는 말들을 하죠. 어이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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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12: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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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 (112.XXX.XXX.11)
참 올바르고 적절한 지적입니다. 예전에는 한문을 많이 써야 유식한 사람이 되는 양 하더니 요즘은 영어를 많이 섞어서 쓰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안타깝답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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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0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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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119.XXX.XXX.227)
맞습니다. 쓸데없이 영어단어 그것도 엉뚱하게 많이 섞는 사람들 많죠!
동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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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1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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