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무슨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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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무슨 아르바이트

황경춘

2010년 11월 08일 (월) 03:34:58

60대에 직장을 정년퇴직한 뒤 30여 년을 ‘허송세월’했다고 한탄한 90대 중반의 어느 분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고 후회한 것이었습니다. 30년이면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도 있는 긴 세월이라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4~5년 전 이웃나라에서 <1세에서 100세까지, 100인의 꿈>이라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진과 더불어 장래의 꿈을 소개한 책인데, 그 가운데 90세 되는 부인이 지금부터 영어를 배워 많은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년이면 미수(米壽)를 맞이할 나이에 저는 뜻하지 않게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신문사 온라인(online) 영문판 번역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야기가 있을 때 별 깊은 생각 없이 마음이 동했습니다. 영문 이력서를 보냈더니 바로 그 날부터 번역 일을 부탁해 왔습니다. 반평생 하던 일이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가계(家計)를 도울 필요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어서 보수를 물어왔을 때 좀 어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받지요” 라고 했더니, 번역전문 회사가 요구하는 200자 원고지 한 장에 얼마 하는 금액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언론계 경험을 참작하지 않고 직업 번역인과 같이 대우한다는 게 약간 서운했지만 내색은 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국 작품의 번역 일을 많이 한 김흥숙 여사가 얼마 전 말한 것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꼼꼼히 관련 자료를 참고하고 번역문을 나름대로 다듬고 해도 출판사가 주는 원고료는 일률적으로 다른 번역가에게 주는 것과 동일한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혹시 이런 고민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 앞섭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작업은 제가 사전에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았습니다. 번역문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지금까지의 일정 조절문제도 있었으나, 역시 제일 걸림돌이 된 것이 고령화로 인한 일의 능률 문제였습니다. 애초에 예상은 했지만 일에 익숙할 때까지는 당분간 견뎌내야 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특히 체력보다 뇌기능의 비효율(非效率)에 저 자신 실망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잘 쓰던 영어 낱말도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작업 속도에 차도가 보이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아르바이트 일이 몰고 온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이제 제게도 주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은퇴생활에는 평일과 주말의 개념이 그리 뚜렷하게 생활 속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요일에는 신문이 없다는 것, 노인네 외출은 주말을 피해야 한다는 것, 평일 외출은 절대 출퇴근시간대를 피해야 한다는 것 등만이 요일 개념을 상기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말에 신문이 없으니 자연 아르바이트 일도 없어 좀 여유 시간을 즐기는 신세가 되고 요일 개념도 좀 뚜렷해졌습니다.

이번 아르바이트 일을 별 깊은 생각 없이 덥석 시작한 뒤 어느 날 잠자리에서 저 자신의 성격과 걸어온 길을 곰곰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저 자신이 계획성이 부족하고 일에 대한 호기심 또는 욕심이 너무 많아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난처한 지경에 빠진 일도 있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해 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 난 1950년 말 피난수도 부산에서 영문 일간지 Korea Times(코리아 타임스)가 창간되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비교적 좋은 급료로 근무하던 저는 거의 비슷한 월급을 주겠다는 신문사 기자직을 탐내 깊은 생각 없이 대사관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대사관 측이 사표를 수리하지 않아 난처한 입장에 부닥쳤습니다. 결국 저의 강경한 입장을 고려해 대사관은 오후 세시까지만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신문사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특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구 근처에까지 공산군이 진격한 당시라,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제가 하던 일을 당장에 맡을 사람을 뽑기가 보안상 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불쑥 사표를 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덕분에 2년 가까이 영문지에서 일하면서 장수영(Henry Chang, 고인)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이시호(후에 로이터 서울지국장, 고인), 진철수(후에 AP 서울지국장,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역임), 신화봉(당시 AP 특파원, 고인) 등 많은 언론인 친구와 교분이 생겼습니다. 결국 저 자신도 이를 계기로 1957년에 AP 서울지국에 입사하고 외신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 저는 AP에 있으면서 아르바이트로 미 시사주간지 Time의 스트링거(통신원) 일을 비공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원래 AP 직원은 다른 언론사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일절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타임 스트링거로 있던 친구가 잠깐 미국에 갔다 온다고 부탁해 그가 없는 동안만 비공식으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갔다 온다던 이 친구는 미국에서 가게를 열어 자연 귀국이 늦어졌습니다. 그러는 도중 타임지 실수로 제 이름이 잡지에 실리는 바람에 저의 아르바이트 사실이 들통 났습니다.

제 이름을 절대 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긴 타임 동경지국은 저와 AP 동경지국에 사과를 하고 삼자가 협의를 한 결과 AP에서는 저의 아르바이트를 묵인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타임지가 주간 잡지로 AP의 경쟁사가 아닌 점, 그리고 타임지가 뉴욕 타임스와 더불어 AP의 대주주이고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서로 취재에 협조하는 사이라는 등의 사정으로 사건이 무사히 무마되었습니다.

저는 이 아르바이트 일을 계속하다가 결국 1987년 제 AP 근속 30년을 계기로 정식으로 타임지로 옮겨 갔습니다. 이때도 급료 문제보다 시차 관계로 24시간 일에 얽매이게 되는 통신사 근무에 지쳐 좀 편안한 주간 잡지를 택한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일과 직장 관계로 난처한 지경에 빠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에 관한 한 저의 과욕 때문에 혹은 길게 앞을 내다보는 계획성의 부족 때문에 또는 전시하의 피치 못할 사정 등으로 인해 저의 이력서에 올리지 않은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아르바이트도 졸속으로 시작은 했으나 예외로 말썽 없기를 바랍니다.

김흥숙 (211.XXX.XXX.58)

선생님, 새로운 일 축하드립니다. 요즘은 번역료에 약간의 차등이 있습니다. '번역전문 회사가 요구하는 200자 원고지 한 장에 얼마'는 선생님께는 너무 적은 액수일 겁니다. 선생님처럼 높은 실력과 경륜을 가지신 분께 그렇게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너무 조금 받으시면 다른 번역자가 받는 번역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황경춘 선생님 같은 분도 이만큼 받으시는데 당신은 더 조금 받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번역료를 깎으려할 테니까요.^^ 즐거운 작업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