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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그 번호 856-4435
신아연 2010년 11월 10일 (수) 01:55:32
“집에 전화가 안되네, 이상한 안내만 나오고…” “ 엄마네 전화 번호 바꿨어, 올케네 번호로. 이제 그 번호론 안돼…”

친정에 전화가 안돼서 언니한테 확인을 해 보니 번호가 바뀌었다는 대답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올케가 애들을 데리고 시어머니, 그러니까 제 친정어머니 집에서 살기로 하면서 이삿짐에 자기 집 전화번호까지 싣고 왔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번호가 어떤 번혼데…’

그 때처럼 올케가 야속하기는 처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자기 편한 대로 했을 거라 싶으니 부아가 치밀어 며칠이 지나도 속이 상했습니다. 집에 붙박여 있는 노인네에게 이따금이나마 걸려오는 일가붙이들의 전화마저 불통되게 할 건 뭐며, 식구 수대로 핸드폰이 있는 처지에 이사를 한들 당장 답답할 일도 하나 없을 텐데 꼭 그렇게 자기네 위주로 했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전화번호 따위가 뭐라고, 상황따라 바뀔 수도 있지 하실 테지만 우리 가족에게 그 전화번호는 번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사람은 세월따라 수명을 잃어가지만 오래 가까이 해온 물건들은 연수가 지날수록 생명을 지닌 듯 정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구체적이고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아닌 조합에 불과한 추상적 번호에서조차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느껴집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처음 전화를 들여놓은 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으니 그 번호는 얼추 40년을 한 식구가 되어 한 세대가 훨씬 넘도록 우리 가족의 대소사를 실어 나르며 집안의 지난한 역사를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4남매의 대학 합격과 낙방 소식, 가슴졸이며 기다리던 애인의 연락, 무기징역을 사시던 아버지의 하루 동안의 귀휴와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가석방, 형제들의 결혼, 조카들의 탄생, 오빠의 암 선고, 그리고 1년 후의 사망, 아버지의 치매, 돌아가심, 최근 올케 가족에 닥친 불행까지…

누구든 그 번호만 누르면 우리 가족의 근황을 알 수 있었으니 자식들이 모두 떠난 후 홀로 번호를 지켜오던 친정어머니는 호주에 사는 제게까지도 “ 너 열살 때 친구라더라. 혹시 하고 전화해 봤는데 아직도 번호가 그대로냐며 깜짝 놀라더라 " 는 등의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주곤 하셨습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이 수많은 사연들을 담아내던 그 번호는 가족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 제게는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그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머니의 한결 같은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올케가 실수로 많은 돈을 잃고 집까지 떠내려 가는 바람에 3남매를 데리고 시어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었지만 그 돈을 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가슴아파하면서도 솔직히 그다지 실감되진 않았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복작거릴 다섯 식구가 안쓰럽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연이어 또다시 불행을 겪게 된 조카들이 가여운 것 이상으로 친정 전화번호의 부재가 제게는 큰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그게 무슨 값어치 나가는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평생 빼앗기며 살아온 어머니가 이제 하나 남은 전화번호까지 생전에 박탈 당해야 하냐며 억지를 부리고도 싶었습니다.

한 번도 발설한 적은 없지만 내심 저는 그 번호와 어머니는 함께 소멸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번호의 부재는 곧 친정의 부재라는 결론도 내려두었습니다. 오빠와 아버지가 먼저 떠난 친정에서 어머니가 안 계시면 더 이상 전화번호를 지켜 줄 이가 없으니까요…

그런 전화번호가 어머니를 앞서 홀연히 먼저 세상을 버렸으니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망한 ‘ 친정 전화번호 856 -4435를 기릴 양으로 나름의 '애도 기간'을 가진 후에도 한 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최근에서야 올케네 전화번호를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아, 언제나 차분하고 정갈한 어머니의 음성이 전과 다름없이 들립니다. 돌아가셨던 분이 되살아 오기라도 한 듯 저도 모르게 잠시 화들짝 놀랍니다. 전화번호의 부재가 어머니의 부고가 아님을 증명하듯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는 어머니에 안도하지만 '죽어버린' 전화번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립니다.

안녕, 소중했던 번호 856- 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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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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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10.XXX.XXX.249)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대수냐 싶기도 하고, 또 생각해 보면 살면서 그럼 대수는 뭔가 싶기도 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아프고 안타까웠던 것은 저는 그걸 대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겠지요... 덧글로 용기주신 모든 분들께 일일이 답글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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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8: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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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13)
저도 그 사라져버린 번호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수십년 이어온전화번호를 아무렇지도않게 바꿔버린일은 정말 안타까운일입니다. 저는고등학생시절 처음 집에 전화가 생겼는데 그 때 그 번호에 old를 붙여서 패스워드로 쓰고 잇습니다. 클릭 할 때마다 여고시절을 회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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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2: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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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121.XXX.XXX.215)
글은 짧지만 내용은 긴 소설 같습니다. 많은 사연들을 정감 있고 깔끔하게 다룬 글 솜씨가 부럽습니다.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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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15: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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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h (110.XXX.XXX.249)
아름다운 이야기, 향기나는 수필 한편을 읽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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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06: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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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 (110.XXX.XXX.249)
가끔씩 숫자가 더 명료하게 사실을 말해줄 때가 있지요. 그 번호가 그랬군요.
아직도 그 번호가 다른 사람이 사용중이 아니므로 복원할 수도 있겠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새 번호를 통해 어머니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나도 노모가 계시다는 이유만으로도... 김창영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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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06: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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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110.XXX.XXX.249)
공감합니다. 번호 하나가 아니라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요. 그것이 어머니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올케께서 사려깊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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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06: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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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철 (110.XXX.XXX.249)
오랬만에 글을 만나 기쁩니다. 여과없이 써 나가는 진솔한 이야기가 저에게는 무척 공감이 됩니다. 그 이후 올케와의 관계 이야기가 긍금하네요. 혹시 그러한 기분 나뿐 일로 불쾌해진 마음을 어떻게 달래고 극복하는지 알고 싶네요. 좋은 나날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면서...최병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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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06: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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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묵 (110.XXX.XXX.249)
집안에 일이 많이 있었네요.

참 힘드셨겠어요.

그 아픔이 느껴지네요.

힘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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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20: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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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23)
아연씨의 사연보다는 덜 얽혀젔지만,집전화 번호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손닳는 곳에 놓고 쓰신지 25년된 되었지요.
어머니가 외부와 연결되어 서너분의 친구들과 교감을 나누시던...
밖에서 집전화를 걸면 제일 먼저 손이 닳아서 전화의 주인이 셨는데.
내년 9월까지는(이사 예정)존재해서,어머니의 느낌을 이어 주겠지요.
물건에 정이 들어 쌔까망 해진 냄비에 찻물을 끓여쓰는데 그래서 인지
살림이 빛은 안나도 다정한 추억들은 이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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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10: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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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220.XXX.XXX.62)
아!~ 제 일처럼 가슴이 아리네요.
저도 452-3153 전화번호를 지키지 못해 가슴앓이를 했었는데....
지근 거리에서 살면서도 집을 비울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두대를 유지했으면 되었을텐데 농촌에서 두대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사치로 생각하고 그만.....
그토록 많은 사연을 실어나른 소중했던 번호856-4435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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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09: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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