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편지 한 장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허영섭 동서남북

가을날의 편지 한 장

허영섭

2010년 11월 19일 (금) 01:09:36

벌써 가을 날씨도 막바지인 듯합니다. 옷소매를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이 괜히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듭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도 하지요. 설악산과 지리산에는 이미 눈발이 날렸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두터운 점퍼에 목도리를 두른 차림으로 출근하는 모습들이 요 며칠 사이에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하긴,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立冬)이 열흘쯤 전에 지나갔고, 며칠 뒤면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입니다. 하늘에서는 무지개가 걷히고 땅 기운이 막혀 추위가 닥쳐온다는 절기이지요. 겨울 추위가 다가옴에 따라 아마 내주에는 집집마다 김장 준비로 분주해지지 않겠습니까.

계절의 기억을 더해주는 단풍 구경도 이번 주, 그리고 다음 주쯤에는 거의 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심 거리의 은행나무도 노란 잎을 거의 다 떨궈 가고 있습니다.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는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습니다. 때로는 낙엽 밟히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 읊조리는 싯귀처럼 쓸쓸하면서도 나직하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약간씩 다르겠지만, 한해를 통틀어 이때만큼 갖은 상념에 잠기게 되는 시기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계절이 엇갈리는 시점에서도 특히 가을을 보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가 비슷한 모양입니다. 풍성했던 한해가 저물어가면서 잎사귀가 시들고 열매가 떨어지는 자연의 조락(凋落) 현상은 한편으로는 감상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성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하나의 보잘것없는 낙엽이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스스로를 돌아다보며 겸허해지고 순수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눈부셨던 한때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중년으로 접어드는 경우일수록, 또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생각은 더욱 깊어지게 되나 봅니다. 이런 착잡한 감상을 견디지 못해 공연히 옆 사람에게 짜증을 부리고 투정을 늘어놓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역시 ‘가을 신드롬’이겠지요.

문득 고궁의 돌담길을 걷고 싶다거나, 열차표 한 장 달랑 사들고는 어느 한적한 간이역에 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때입니다.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도 좋지만, 그보다는 옷깃을 세우고 혼자서 걷는 산책길이 더 멋스럽고 분위기에 어울립니다. 이런 경우 길모퉁이의 어느 전파상에서 샹송의 허스키한 곡조라도 흘러나온다면 더욱 제격입니다.

가을 노래로 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노래가 여럿 있습니다. 듣다 보면 저절로 가슴이 시려져 점잖은 체면에도 콧물을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꺼내들게 만드는 노래들이지요. 지금은 그 중에서도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라는 노래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딘지 허전한 마음을 편지에 털어놓는다는 것일까요.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없는 심정을 편지를 통해 전달한다는 뜻이겠지요.

생각해 보면 편지를 써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이메일이 있고, 핸드폰 문자로 간단히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어 편리한 세상이 되었건만 그렇다고 그것이 편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으로서 편지는 어느새 우리 주변에서 멀어져간 것 같습니다.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거북하게 됐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이 바빠지고 메말라졌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가을이 지나가기 전에 편지를 쓰는 것도 훌륭한 추억거리일 것입니다. 더욱이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서 버스나 열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서, 또는 잠깐 들른 휴게실에서…. 아니면 산책길의 공원 벤치에 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적는 편지는 더욱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냥 책상에 앉아 긁적거린 편지라고 한들 또 어떻겠습니까.

편지를 받는 것도 편지를 쓰고자 하는 만큼이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혹은 까마득히 잊혀졌던 어린시절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내가 은근히 미워했던 사람, 그리고 나를 미워했던 사람으로부터도 편지를 받고 싶습니다. 가을을 보내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는 뜻일까요. 꼭 편지를 받고 싶다면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편배달부를 거쳐 되돌아온 그 편지가 언젠가 빛바랜 앨범 사진처럼 책갈피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행여 편지를 쓴다면 우체국을 찾기보다는 길가의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기를 바랍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우체통만큼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도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전화라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그야말로 빨간 우체통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새삼스럽게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되다니 겸연쩍기조차 합니다.

가을은 지나가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가로수들도 마지막 잎새를 떨구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 남은 기간에 숲속길 낙엽을 밟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배낭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입니다. 물론 조용히 틀어박혀 젊었을 때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는 것도 권할 만합니다. 그렇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편지지를 꺼내놓고 천천히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을을 보내는 소중한 추억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차덕희 (121.XXX.XXX.172)

"봄에 찾아 뵙겠습니다"하고는 여태 못 뵌 분이 생각나서,우표 붙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빈 말이 아니 였는데,그래서 은근히 기다릴 분이 떠올라서요.
여자들은 편지를 무척(깜짝 놀라듯) 좋아하는데 남자분들은 어떠하신지 잘 몰랐거든요.
사연이 있어서 저의 안부가 궁금 하실 분이셔서,좋은 행동은 서두르는 것이 좋아 행동으로 실행했지요.
김장거리 다듬는 것을 잠시 미르고요.

답변달기 ▼

2010-11-19 14:34:20

0		0

허영섭 (59.XXX.XXX.82)

남자들이라고 왜 편지 받기를 싫어하겠습니까.
좋은 추억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

2010-11-19 16:21:47

0		0

인내천 (112.XXX.XXX.244)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는데 왜 그랬을까요?
암튼 낙엽지는 가을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마땅한 대상이.... 아예 답장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내기만 했던 젊은날의 펜팔 추억이 어젠듯 또렷합니다.
오늘 밤엔 묵은 가방을 열고 희노애락이 베인 빛바랜 편지들을 읽어 보렵니다. 그리고 올 들어 세번째 편지를 쓰겠습니다.

답변달기 ▼

2010-11-19 10:32:08

0		0

허영섭 (59.XXX.XXX.82)

편지 뭉치를 간직하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그 자체가 소중한 마음의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답변달기 ▼

2010-11-19 16:23:5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