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불태운 대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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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불태운 대만 사람들

허영섭

2010년 12월 07일 (화) 01:28:03

종주국인 한국을 제외한다면 대만 국민들에게만큼 태권도가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온 나라가 환호할 정도로 흥분도 주었고, 눈물도 주었습니다. 바로 지난 2004년의 아테네 올림픽에서였지요. 대만 선수들이 두 개의 금메달을 땄는데, 둘 다 태권도 종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만이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이래 처음으로 따낸 금메달이었기에 기쁨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금메달로서 안겨준 환호보다는 뼈저린 서러움이 더했습니다. ‘나라 없는 슬픔’이었지요. 우승은 했어도 국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는 게양되지 못했습니다. 시상식장에 울려퍼져야 할 국가도 침묵했습니다. 그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 깃발이 게양됐고,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국기가(國旗歌, Song of the National Flag)’가 연주됐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은 물론 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모든 국민들이 온통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 대만에서 태권도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권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됐고, 인기 연예인들이 곧잘 태권도 복장으로 방송에 출연했는가 하면 각종 행사때마다 어린이들의 태권도 시범이 선보여졌습니다. 전체 인구가 2,300만 명인 대만에서 태권도 수련자가 무려 200만 명을 넘어선 것도 벌써 몇 해 전의 일입니다. 군대와 경찰에서는 태권도가 필수 훈련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그 태권도로 인해 태극기가 대만 길거리에서 찢겨지고 불태워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난달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있었던 대만 태권도 선수에 대한 실격패 판정으로 반한 감정이 표출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선수가 대만 국민들의 기대를 모으던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고 하지요. 아테네 올림픽에서처럼 금메달을 바라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분노로 인해 타이베이의 한국 학교에는 계란이 투척됐으며 한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뒤에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반한 시위가 저절로 진정됐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자랑해 왔던 양국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태권도에 대한 애증이자,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에 대한 애증으로 이해됩니다.

대만 국민들은 문제의 실격패 판정을 발표한 필리핀 경기감독위원이 한국계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세계태권도연맹(WTF) 관계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타이완 선수가 의도적인 속임수를 썼다”며 다소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도 흥분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어떤 방송 진행자는 “한국의 소녀시대가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겠다”고 발언할 정도로 현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살펴보면 그 대만 선수가 규정 외의 충격전달 센서를 부착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경기에 앞서 두 차례에 걸쳐 검사를 하고도 이를 제대로 적발해 시정하지 못한 심판진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사전에 조치가 취해졌다면 경기가 승리로 굳어지는 상황에서 몰수패를 선언한 것보다는 후유증이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이번 사태는 직접적으로는 실격 판정에 따른 불만에서 비롯됐지만, 내면적으로는 고유의 국기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울분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손해를 봤다. 광저우가 처음도 아니고, 절대로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는 대만 관영 중앙통신의 보도내용은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국제행사에서는 국호조차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나 ‘타이완(Taiwan)’ 대신 ‘차이니스 타이페이(Chineses Taipei)’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니까요.

중국과의 원초적인 갈등 때문입니다. 대만이 국제무대에서 청천백일기를 사용하는 자체를 독립 움직임으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안관계가 상당히 개선됐다는 요즘에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는 셈이지요. 여기에 대만 선수가 실격패를 당한 태권도 종목에서 중국 선수가 최종적으로 금메달을 따게 됨으로써 한국과 중국이 대만을 은근히 왕따시키고 있다는 인식도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반한 시위는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섭섭한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연원이 멀리 1992년의 단교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너무 동떨어진 얘기일까요.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명동 대사관에 게양되던 국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진 데다 대사관마저 중국에 내주고 쫓겨가듯 물러난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지금 사태와는 관계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억눌렸던 감정이 이번 판정 시비와 맞물린 것이 아닌가 하는 얘깁니다. 물론 그밖에도 세계 무대에서 한국과 나란히 경쟁하다가 갈수록 뒤처지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만 국민들의 반한 시위로 인한 갈등은 마잉주(馬英九) 총통까지 나서서 서둘러 진화하고 있으므로 더 크게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격패를 당한 선수 본인도 오히려 "한국에는 잘못이 없다"며 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다고 하지요. 더욱이 양국은 서로 중요한 교역 상대이고 관광객만 해도 연간 60만명에 이를 만큼 민간교류도 활발한 상태입니다. 또 대만에서 한류에 대한 인기는 다른 어느 나라의 경우에 못지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로서도 태극기가 불태워졌다는 사실에 불쾌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대만 국민들이 그토록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는지 이 기회에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이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의도적이든 간에 매듭을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한번 토라졌다고 해서 다시 만나지 않을 사이라면 진정한 우호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도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과거가 있지 않은가요. 가까운 시일 안에 태권도 친선교류전이라도 열어 서로 우호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합니다.

happy (112.XXX.XXX.231)

잘 읽었습니다. 20여년전에 대만에 3년여 근무후,홍콩,중국 주재 근무를 해보았어도, 현재까지 교류하고있는 사람은 대만 사람들뿐입니다. 비교하여보면 그만큼 그들은 의리가 있습니다.한국 자녀 결혼식까지 자비를 털어 참석할 정도니까요. 장개석 총통이 우리나라의 해방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세계 조류에 따라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였을때, 당시 한국에 대해 엄청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었죠. 세월이 흐르면서 교류를 넓히고 있는 도중에 이런 황당 사건(한국계 필리핀인을 그들은 전 세계 화교와의 끈끈한 관계처럼 보았나봅니다)이 일어났었죠. 마지막 제의 건은 친선 도모 차원에서 우리 태권도 협회에서 적극 검토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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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12: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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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59.XXX.XXX.60)

맞는 말씀이십니다. 앞으로도 서로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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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16: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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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sun (211.XXX.XXX.146)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 태권도 친선교류전 제의는 탁견입니다.
- 과거의 중화민국 대사관 자리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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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0: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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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59.XXX.XXX.64)

졸문에 대한 관심과 격려 고맙습니다.
양국 관계가 조속히 정상으로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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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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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o (121.XXX.XXX.155)

태권도 친선경기는 멋진 제안으로 보입니다. 대만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양 국민의 이해를 도모하는 데 좋은 방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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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0: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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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59.XXX.XXX.64)

선배님의 세심한 지적에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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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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