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시대 꼬집은 패러디 가요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황경춘 오솔길

암흑시대 꼬집은 패러디 가요

황경춘

2011년 01월 13일 (목) 00:11:49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패러디(parody)는 성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패러디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의 음악 작품이었던 때문인지 패러디 중에서도 대중이 가장 친근감을 갖는 것이 패러디 노래라 하겠습니다. 숨 막히게 답답한 시절에 패러디 노래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느낀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패러디 노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지난 연말에 세상을 뜬 한 일본 여배우 때문입니다. 나이 들면서 더욱 안타깝게 느끼는 일이지만, 지난해에도 우리의 추억에 깊이 새겨진 국내외 연예인 몇 사람이 타계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중에서도 연말에 갑자기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일본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에 관한 추억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저와 동갑인 그녀는 다섯 살 때 북해도에서 동경의 영화촬영소에 구경 갔다 아역으로 발탁된 뒤 50년 동안 영화계에서 인기스타로 활약하고, 50대 중반에 돌연 은퇴를 발표해 아쉬움 속에 은막을 떠난 뒤에는 베스트셀러 수필가로 이름을 날린 보기 드문 삶을 산 여성이었습니다.

일제 암흑기에 천진난만한 소녀 역할로 소위 ‘건전 영화’의 단골로 출연하여, 저는 학교 단체관람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후에도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 많은 수상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섬마을 분교 여교사 역을 맡은 “스물넷의 눈동자”<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는 지금도 일본영화 명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1941년에 그녀가 출연한 ‘말’(馬)이란 영화는 어느 시골에서 말을 키우며 사는 소녀를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줄거리도 좋았지만 경쾌한 멜로디의 주제가가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을 시작한 지 3년째이던 1943년에 저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 갔습니다. 식량사정이 극히 나빠 하숙을 구하지 못 하고, 이미 동경에 와 있었던 외육촌 형과 같이 방을 얻어 식사는 밖에서 하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집 주인은 전쟁터에 나갔고 20대 후반의 그의 아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딸아이 하나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딸아이는 가끔 2층 우리 방에 놀러 왔습니다. 하루는 “오빠, 이런 노래 알아요?” 하며 들려준 것이 바로 이 영화 ‘말’ 주제가 멜로디였는데 가사가 통째 바뀐 패러디 노래였습니다. 그 노랫말은 매우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원 가사는 지금 전연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패러디 노랫말은 아래와 같이 워낙 유머러스한 내용이어서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약국 주인은
백묵 갈아 만든 게 가루약이고
말 오줌으로는 물약 만들고
코딱지 굴려서 은단 만들어
이걸 사먹는 자 바보멍청이!>

저는 동경에 오기 전에는 이 패러디 노래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본 아이들과의 접촉이 그리 많지 않은 지방 소도시에서 공부한 탓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일본 본토에서는 군사정부나 전쟁에 대한 반항심을 이런 식으로 발산시키는 분위기가 식민지와는 좀 다르다고 느껴져 흥미로웠습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저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촌 여동생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주었더니 경쾌한 리듬과 재미있는 가사 탓인지 쉽게 외우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깜찍한 꼬마 아가씨가 들려 준 또 하나의 재미있는 패러디 노래가 기억납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당시 일본은 소위 건국 이래의 연호(年号)를 사용했으며 1940년이 마침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전쟁에 시달리던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기원은 2천6백년, 아~ 일억 국민의 가슴은 뛰다”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한 소절이 여섯 줄로 된 행진곡조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서민이 가장 많이 피우던 담배 이름인 ‘긴시’(金鵄), ‘히카리’(光), ‘호요쿠’(鳳翼) 세 단어가 이 노랫말 앞 세 줄에 차례로 들어 있었습니다. ‘긴시’는 일본 초대 ‘진무’(神武)천황이 개국 당시 반항하던 부족들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전설적 금빛 새로, 일본군 창설과 함께 군의 상징이 되고 최고 무공훈장을 ‘긴시’ 훈장이라 이름 지은 연유도 이 때문입니다.

패러디로 개작된 노래는 <‘긴시’는 올라서 15전, 영광의 빛 ‘히카리’가 30전, ‘호요쿠’ 더 올라 40전 ...아~일억의 돈은 줄기만 하다 >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먼저 노래에 비해 이 패러디는 정부가 만든, 그것도 다름이 아닌 국체(國體)에 관련된 국민가요를 꼬집었다는 점에서 훨씬 노골적인 반항심의 표출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 패러디 노래는 지방에 따라 가사가 약간씩 다르게 불렸다는 사실이 지난 가을 일본이 대대적 담배 가격 인상을 발표했을 때 일부 신문의 칼럼에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운 경험이 없지만 당시의 담뱃값은 이 노래 덕으로 이렇게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학생 하숙비는 한 달에 13~15엔이었습니다.

이 밖에 전쟁이나 군대를 겨냥한 여러 가지 노래가 당시 비공식으로 많이 유행했습니다. 그중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 하나를 소개합니다.

<대령, 중령, 소령 노인 냄새 나
그렇지만 대위에는 아내가 있고
귀여운 소위에는 돈이 없어요
연애를 하려면 중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