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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도 때로는 통하지 않는다
이승훈 2011년 01월 13일 (목) 00:13:04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때도 물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진실을 얘기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꼬여서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구차하게 거짓을 꾸미는 걸로 오해 살 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누구나 한두 번은 겪어 봤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서 진실이 밝혀진 후 그것 보라고 호통 쳐 봐야 당시의 섭섭함이 완전히 누그러지는 것도 아닌 그런 상황 말입니다.

이집트의 환전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흐름 좋게 줄어들던 줄이 조금만 기다리면 제 차례가 오는 상황에서 멈춰 섰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도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않는 줄. 앞쪽에서 큰 소리도 오고가는 것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줄을 벗어나 창구 쪽으로 향하니 반백의 남자 하나가 소리 소리 지르면서 뭔가 항의하고 있었고 새침하게 생긴 젊은 여자 사무원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습니다. 남자는 붉은 색 종이 하나를 계속 창구 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고 사무원은 그때마다 거칠게 남자 쪽으로 그 종이를 던지듯 돌려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만? 저 종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자세히 보니 공교롭게도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종이는 이황 선생님이 그려진 한국의 천 원짜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들을 수야 없었지만 정황상 남자는 우리 돈 천 원을 이집트 돈으로 바꾸고 싶어 하고 은행이 아닌 작은 환전소이기에 달러나 유로 외에는 취급하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라는 다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집 센 아랍 사람 특유의 싸움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서 계속 수모를 당하고 있는 이황 선생님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둘 다 싸움을 멈추고 내 얘기를 들으세요. 그건 우리나라 돈이니 제가 미화나 이집트 파운드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안도한 듯한 사무원의 표정에 비해 갑자기 나타난 뚱뚱한 외국인을 전혀 신뢰하기 힘들다는 표정의 아저씨.

"그래? 그럼 이 돈이 미화(美貨)로 얼마나 하죠?"
"대략 1 달러 정도?"

지갑에서 1 달러짜리 지폐를 채 꺼내기도 전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아저씨는 마치 내가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천 원짜리 지폐를 낚아챈 후 주먹 가득 구겨 쥐고는 환전소 밖으로 씩씩 거리면서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야 좋은 마음에 별 생각 없이 나선 것이지만 상대가 그것을 알 리가 있나요. ‘1000’이라고 쓰여 있는 지폐와 ‘1’이라고 쓰인 지폐가 가치가 같다면 누구나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 더욱이 바가지 요금과 흥정이 생활화 되어 있고, 이익이 없는 한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관광지 주변의 인심까지 감안하면 그가 싼 값에 자신의 것을 뺏어가려는 시도로 오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졸지에 사기꾼으로 몰리게 생겼다는 마음에 '미스터'를 연발하면서 쫓아 나갔지만 아저씨는 침을 한 번 바닥에 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갔습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라 생각했더니 기념품 가게에서 비싸서 안 사겠다면서 뛰어나오면 점원이 부리나케 뛰어 나와 깎아 줄 테니 사라고 팔을 붙들고 애원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갑과 을이 바뀌어 있긴 하지만.

하기사 그를 설득할 기회가 있었다 한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나의 결백을 어찌 증명할 방법도 없었기에 그저 감언이설로 자신을 속이려 한다는 불신만 더 깊어질 뿐이었을 겁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씁쓸한 심정으로 다시 줄로 돌아가 순서를 기다리다 왠지 큰 손해를 본 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직이 한마디 중얼거리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화폐개혁을 하긴 해야겠구만."

1979년 서울 출생. 단국대 치대 졸. 2008년 <한맥문학>으로 문단 등단.
한국문인협회, 치과의사 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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