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볼 때 철옹성처럼 보였던 무바라크 30년 독재 체제가 시민혁명에 의해 무너졌고, 그 파장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 땅 면적은 약 100만 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10배가 넘고, 그 인구는 8,500만 명입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이집트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번 이집트 시민혁명의 파장은 그 땅과 인구에 비해 훨씬 더 큽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이집트 사태를 주시하고 있지만, 미국의 태도가 관심을 끕니다. 미국은 이집트 사태에 노심초사하고 전전긍긍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민주주의 가치를 신봉하는 국가로서 또 그 가치를 전 세계로 확산하기를 바라는 국가로서 이집트 혁명을 누구보다 좋아해야 할 미국인데, 사실은 현실적 국익이라는 문제와 부딪쳐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고민에 빠진 듯합니다.

이집트는 서양 문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상징되는 찬란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고, 로마시대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정복자들의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로마의 영웅들이 그랬고, 나폴레옹도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면모를 이집트 땅을 밟음으로써 과시했고 또 인정받았습니다.

18세기 식민지 시대 이후 이집트는 더더욱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관문으로서 그 역할이 컸습니다. 영국이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대영제국의 기치를 과시하는 데도 이집트를 수중에 넣은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로서 이 수로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더욱 요충지로서 위치를 견고히 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약 8퍼센트가 이 좁은 수로를 통과합니다.

2차 대전 후 반 세기에 걸쳐 중동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독립한 이집트는 나셀혁명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랍민족주의 맹주를 자처했습니다. 이집트는 지정학적으로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이라크에서 모로코에 걸쳐 있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아랍권 중심 국가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아랍민족주의의 영향력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결합하여 그 외연이 더욱 확대됩니다.

반면 2차 대전 후 영국은 유럽으로 후퇴하고 대신 미국이 중동에서의 서양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됐습니다. 아랍과 미국의 이해관계 충돌의 매개체는 이스라엘과 석유입니다. 중동은 2차 대전 후 가장 전쟁이 빈번한 화약고가 됐고 그 원인은 이스라엘과 석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해, 그리고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미국은 서슴없이 군사력을 동원해 왔습니다.

이집트는 아랍민족주의의 총대를 메고 제일 먼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가 이집트입니다. 필사적인 미국의 노력이 맺은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고 사우디의 석유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랍국가에서 굳이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것보다 독재정권이나 왕정과 관계를 맺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또한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특성상 민주주의가 성장할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79년 이란혁명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호메이니의 신정(神政)체제가 들어서 미국에게 30년간 목의 가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2002년의 9ㆍ11 테러는 미국의 안보관을 바꿔놓았습니다. 국경 없이 출몰하는 이슬람 테러조직이나 원리주의자들을 미국 안보에 더 위협적인 존재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아무리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자에게도 원조를 주고 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아랍 정책으로 보나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 이집트의 친미 안정화는 미국에게 절대 중요한 조건입니다. 사우디는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 사우디, 이집트의 안정은 그 정체에 상관없이 미국 중동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태가 터졌을 때 클린턴 힐러리 미국 국무장관이 무바라크를 지지한 것이 바로 미국의 이런 속내와 이해관계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30년 전 팔레비왕조가 무너질 때의 이란 혁명과 무바라크가 무너지는 지금의 이집트 혁명은 판이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이란 혁명은 종교성이 짙었지만 이집트 사태는 시민혁명입니다. 혁명의 동인이 종교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모군중의 구호 ‘카페야’(이제 그만)라는 구호에서, 수백 명이 희생됐는데도 시민들이 절제하는 모습에서, 또 무바라크가 하야한다고 발표한 후 수많은 시민들이 삽과 빗자루를 들고 광장을 청소하는 모습에서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혁명의 시위에서 반미구호는 별로 나돌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이집트 사태를 보며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해보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석유와 이슬람무장단체의 테러만 생각하고 중동을 바라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시각이 쉽게 변할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하는 미국 전략가들의 생각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무바라크 사퇴로 절정을 이룬 아랍권의 민주화 바람은 어디서 끝날지 모릅니다. 미국은 아마 시민혁명의 바람이 사우디왕조를 무너뜨리는 사태를 매우 우려할 것입니다. 행여나 이슬람종교 세력이 정권을 잡고 미국과 각을 세우는 날이면 석유공급을 놓고 세계는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집트 사태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집트를 비롯해서 아랍권의 민주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인류보편의 민주주의 가치가 그곳에 정착되고, 경제적으로 석유가격도 안정되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혁명과 정변의 시대를 경험했듯이 장기 독재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민족적 역사적 유산은 쉽게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집트 혁명은 이제 시작된 것이고 우리가 계속 주시해야 할 사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