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학생_(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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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학생

김창식

2011년 03월 11일 (금) 01:15:51

3월에 들어서면 마음이 설렙니다. 봄과 더불어 새 학기가 시작되는 때문이죠.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대학 생활이 오롯이 펼쳐지며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 시절 젊은이들이 그렇듯, 자의식은 과잉되고 채워지지 않는 지적 욕구에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배고픔에 항상 시달린 남루한 청춘이었는데도.

1960년대 후반 어느 해. 나는 여느 학생처럼 등‧하교는 하였지만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이한 신분이었죠. 강의를 입맛대로 골라 들었는데 누가 나서서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 시절 학사 관리가 허술해서 제도적으로 수강을 제한하거나 출결을 강제하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아침 강의에라도 늦을라치면 게으름 피운 학생들은 걸음을 빨리해 교정을 가로지르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그런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부산한 교정 풍경을 즐기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곤 했습니다. 그날은 더구나 좋아하는 강의가 없는 날이니 애초에 서둘 일이란 없었지요. 가끔 한눈 팔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강의실을 찾는 학생들을 보면 문득 소외감이 들며 부럽기도 했지만.

본관 석조 건물 2층에 있는 학과장실에 들러 인사를 드리자 과장 선생님이 "굿텐 모르겐, 헤어(Herr) 김!"하며 미소를 띤 채 맞아주셨더랬지요. 난 골치 아픈 (삼선개헌반대) 시위에 가담한다거나 하지 않은, 교수님이 좋아하실 타입의 '양순한 청년'이었으니까요. 이어 딴 교수님이 웃으시며 안부를 묻는 말씀. "비 게스?(Wie geht's? 요즘 어때?). 교재로 사용되는 프린트물을 준비하는 등 일을 돕다 점심때가 되면 교수님들을 따라 학생식당과는 격이 다른 교수식당에 가서 대학원생이나 조교처럼 교수님 말씀을 경청하며 돼지비계가 듬뿍 들어간 황홀한 점심을 들게 될 것입니다.

교수실과 연결된 쪽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그곳은 나의 홈 베이스인데 교수실과 같은 크기로 큰 탁자 두 개가 연결돼 있고 불편한 의자가 드문드문 놓여 있는 방, 이름 하여 '세미나 룸'이었습니다. 명칭이 그렇지 무슨 세미나가 열린 적은 없고 학년별 소규모 모임이나 휴게실, 때로 여학생들의 탈의실로 사용되는 방이었죠. 난 세미나 룸의 실장이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직책은 아니고 스스로 지위를 부여하고 그렇게 행세한 것인데 그게 그냥 받아들여졌습니다. 누군가 자진해서 청소 같은 허드레 창고지기 일을 하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려나요.

누구나 인정한 바이지만 난 세미나 룸에 정말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여학생들이 체육시간을 앞두고 단체로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들은 내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난 '지옥문을 지키는 개'처럼 엉버티고 서서 망을 보며 아무러한 사람도 결코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답니다. 글쎄 문지기인 나도 안에서 문을 두드려 신호를 해준 연후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니까요. 아, 그때 문을 열자마자 끼쳐오던 배릿하면서도 싱그러운 풀 냄새!

학기 초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어느 봄 날 느꼈던 씁쓸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래 학생은 학업을 계속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공고함.' 게시판에 학생처의 '제1학기 제적생 명단' 공고가 나붙었는데, 그 안에 당당히(?) 내 이름이 일필휘지 붓글씨로 쓰여 있었죠. 지금에야 취업을 이유로 휴학도 하고 복학과 졸업을 미루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죠. 나는 학업을 계속할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했고 장학금 수혜 대상자가 될 만큼 공부도 빼어나지 않아 등록을 못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다 향학열에 불타 학사일정과는 관계없이 여느 학생들처럼 내처 학교에 다닌 것이랍니다.

여러 과의 학생이 섞이는 부전공이나 교양과목은 수강하기에 부담이 없지만, 여우도 낯짝이 있지, 서로 아는 처지인 전공과목은 교수님과 동료들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남세스러웠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낸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오해 말고 들어. 다른 애들이 그러는데 너 말야…." 가을에 접어들며 더 이상 학교에 가기가 멋쩍어지더군요. 주말을 빼고도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세미나 룸 관리가 걱정이 됐지만 누군가 마땅한 사람이 대신하겠죠. 아님, 뭐 원래부터 주인이 없었으니 굳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보냐.

난 지금도 창(窓)을 좋아합니다. 창은 자유와 탈출을 뜻하는 상징물이니까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엔 어둑한 골방에 누워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허물다 꿰맞추기를 되풀이했지요. 내가 무슨 법의학 수사관도 아니고 해체된 인체 조각들을 재결합하는 일은 쉽지 않더군요. 블록 몇 개는 갈 곳을 찾지 못해 제멋대로 바닥에 버려졌고 일탈된 블록 조각 개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나는 방에 누워 꿈꾸었습니다. 하늘로 열리는 조그만 창이 있었으면…. 그해 말 입대했습니다. 일 년여에 걸친 '이상한 학생' 생활을 청산한 것입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나는 그때 학생도 조교도 아닌 청강생, 정확히 말하면 도강생(盜講生) 신분이었다고요.

김윤옥 (210.XXX.XXX.77)

그 때의 그 핍진함이 지금 우리의 깊음을 키워준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에나 부족함을 모르는 삶은 안락함 이상 아무 것도 아닐 것같습니다. 그나저나 무보수로 그런 수고를 하셨다니, 이제라도 청구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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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13: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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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그렇습니다, 김윤옥님. 우리가 무엇을 꿈구는 것은 그것이 '갈수없는 나라(nixland)'인 때문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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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4: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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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13.XXX.XXX.32)

그런데 공부는언제 하셨습니까? ㅋㅋ
sah ein knaf ein roslein stehen roslein auf der heiden......
철자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딱 고 3년 동안에만 배웠지요. 그리고 2000년 쯤인가 우연히 독인 지멘스 베트남 지사장 부부와 공치다 제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부인이 eine shone lied 라고 하던데......
입시 취직 만을 위한 공부 외에 자유롭게 놀고 사고할 줄 아는 애들이 나중에 진정한 자아를 찾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지요?
휴우, 그때는 그냥 그래서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그때가 그래도 가장 사람다움을 찾으면서 살았던 것 같아 언제라고 돌아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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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2 1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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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놀랍습니다, UTOPCO님. Knaf-->Knab, eine shone lied--> ein schoenes Lied로만 고치시면.
고3 때 배운 독일어를 지금도 이처럼 정확히 기억하시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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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2 14: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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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28)

저는 빌빌거리며 대학 4년을 보냈지요.
등록금에 시달리는 데다가 전공(수학)이 적성에 않맞아서요.
댓;ㄴ 도서관에서 인문 사회과학을 탐구했지요.
저도 창을 좋아한담니다.
대학입시에 글짓기기 있던 시절인데 제목이 "창"이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ㅂ스에서 밖을 내다 보는 관점에서 글짓기를 했지요.
숙성되지 못한 풋풋한 시절이 떠오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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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1 05: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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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차덕희님도 그런 경험이 있었군요.그 무렵 누구나 할 것없이 가난했으니...
정말 적성에 맞아 전공 공부 열심히 한 사람 무척 드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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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2 14: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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